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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에서 소년, 청년기를 지나는 동안, 멋진 남자와 언젠가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게 자나 깨나 소원이었다. 멋진 남자란 아름다운 외모와 섹시한 두뇌에 기왕이면 넉넉한 집 아들이었다.

돌이켜보니 몸과 영혼과 조건이 다 훌륭한 이성과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은, 매력적인(상품성 높은) 남자가 나를 선택해줘야 나도 상품성 높은 여자라고 확인되기 때문이었다. 외부에서 '너는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데 그토록 굶주렸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의 내가 애처로울 정도로, 잘생기고 스마트한 남자에 대한 갈망은 절절했다. 안타깝게도 대학 졸업까지도, 유학 떠난 후에도, 외모 준수한 능력남이 나더러 사귀자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살아보니 몸과 영혼이 다 출중한 남자(나 여자)는 인구 중 비율이 극소수라 그런 이와 연애하게 되는 확률 자체가 로또였다. 로또에 당첨되지 않았다고 슬퍼 울 일이 아니듯이, 백마 탄 왕자님이 내 차례에 안 왔다고 한탄할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아쉬웠다. 꿈같이 달콤한 연애라는 건 영화·드라마를 보며 충족하는 판타지라는 걸 익히 알 만큼 나이 든 후에도 로맨스 드라마를 보면, 저런 짜릿한 순간 한번 없이 청춘이 지나갔네, 라는 허전함이 가을 하늘 잠자리처럼 맴돌았다.

뭔가가 결핍된 채 삶이 흘러갔다는 상실감이 사라진 건 서른아홉 살에 여덟 살짜리 아들이 생기고 나서였다. 재혼했을 때 남편이 데려온 아들은 초등 2학년이었다. 한집에 살기 시작한 어린 생명체는 밤이면 혼자 자기 무섭다며, 재워달라고 내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는 아이가 너무 예뻐서 정신이 몽롱해지곤 했다. 세상 아무리 잘난 남자가 침실로 가자고 손잡아 끈다 한들 이렇게까지 행복할까, 비교도 안 될 것 같았다. 어린아이라는 존재는 평생 본 영화·드라마 속 판타지를 다 합친 것보다 신비로웠다. 아이의 작은 얼굴에 웃음이 필 때면 디즈니 영화 속 마법사가 요술봉을 휘둘러 온 집 안을 환하게 채우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 꼭 갖고 싶었으나 갖지 못해 서러웠던 건 나를 침실로 초대하지 않는 매혹적인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고 많은 것이 풍요로워졌건만 사람들의 주관적 행복 지수는 기이할 정도로 낮은 이 한국 사회에는 경쟁에 이겨서 그 문 안으로 들어가야 행복해진다고 사람들이 믿는 성(城)이 있다. 각자 목표로 삼는 성은 사람마다 다를 것인 바, 나는 내가 들어가고 싶던 성 안에 못 들어간 사람이었다. 성문 안 사람이 못 되어 가슴에 쌓여 곪아가던 원망과 울분은 어린 아들이 환하게 웃어줄 때마다 봄볕에 눈 녹듯 스러졌다. 마음 밑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 언제까지고 독을 뿜어낼 것 같았던 비관과 분노가 아들을 쳐다볼 때면 흐늘흐늘 분해되는 게 느껴졌다.

자식을 키우는 일은 그런 기적이 일어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이었다. 아이를 보살핀다는 건 살면서 처음으로 나 자신보다 중요한 존재가 생기는 일이었다. 자기 운명을 전적으로 나에게 맡긴 어린 생명을 돌보는 시간이 만든 그 기적을 체험하자 세상은 더 이상 예전의 세상이 아니었다. 성문 안에 들어가지 못해 불행했던 과거의 나를 어린 동생처럼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성문 안에 못 들어갈 바엔 혼자가 낫겠다며 결혼이나 출산을 망설이는 젊은이들에게 기회가 닿는다면 내가 경험한 기적을 들려주고 싶다. 나도 한때는 자식을 안 낳고 '부담 없이 자유롭게' 살려 했던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그러다 인생 계획에 없었던 육아라는 부담을 어쩌다 감당하였고. 그러자 비로소 '행복할 자격'에 대한 오래된 강박으로부터 축복처럼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를. 기고자 : 오진영 작가·'새엄마 육아일기' 저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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