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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일본의 현대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61)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직후 높이 3m, 길이 100m에 이르는 거대한 회화 '오백나한'을 제작해 선보였다. 현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붉은 요괴, 푸른 요괴와 48나한'은 '오백나한'에서 파생한 대작으로, 나한상에 일본 전래 설화의 요괴인 오니를 더했다.

일본 미술사의 대표적 '오백나한도'는 19세기 화가 가노 가즈노부가 족자 100폭에 나누어 그린 것이다. 그 또한 1854년 대지진을 생생히 겪은 다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한도에 매진했다. 불교에서 나한은 고된 수행 끝에 번뇌를 끊고 생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지혜를 얻은 자이자, 석가모니에게 대중을 구제하라는 명을 받은 이들이다. 푸른색이거나 붉은색 몸에 괴기스러운 눈과 머리 위에 뿔을 가진 오니는 성질이 포악하여 사람들을 괴롭히는 요괴다.

무라카미의 그림에서는 이 둘이 오히려 사찰에서 악귀를 물리치고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가 됐다. 강진, 쓰나미, 방사선 유출이라는 삼중 대참사에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한 미술가 무라카미가 기댈 곳은 역시 신뿐이라고 믿었던가 보다. 그러나 눈부시게 오색찬란한 그림 속 나한들에게 거룩함이란 전혀 없고, 그저 익살맞고 어수룩해 뵐 뿐이다. 구원자는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온다.

요즘 뉴스의 양대 화두는 인공지능과 튀르키예 지진이다. 한쪽에서는 챗GPT가 세상을 바꾼다고 떠들썩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늘어만 가는 사망자 수를 세고 있다. 챗GPT에 물었더니 지진은 예측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고 한다. 무너진 건물 더미에 기어 들어가 생존자를 끌어내는 일은 여전히 사람 몫이다. 기고자 :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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