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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신 사람이 경험 들려주는 도서관 '인간책'으로 상담 나서

서울 노원구에 사는 허지현(28)씨는 지난 2018년 4월 '루게릭병' 판정을 받은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루게릭병은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란 희소 난치병으로, 운동신경세포가 점차 소실돼 모든 근육의 움직임이 서서히 멈추며 언어 기능이 상실되고 결국 호흡곤란으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한때 테니스를 즐기던 아버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슬픔 속에서 지켜보며 다른 가족들의 삶도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그러다 허씨는 문득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와의 시간을 추억으로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휠체어에 아버지를 태우고 벚꽃을 보러 나갔고, 아버지와 함께 '미스트롯'을 시청하고 트로트를 불러드리며 추억을 쌓아 왔다.

이런 허씨의 이야기는 언제든 서울 노원구립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있다. 허씨가 이곳에 등록된 '휴먼북(human book)'이기 때문이다. 휴먼북은 사람(human)과 책(book)을 합쳐 만든 말로, 책을 빌려주듯 도서관이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들과 만날 기회를 주는 서비스다. 도서관 이용자들이 만나고 싶은 사람의 사연을 골라 신청을 하면 일대일로 이들을 도서관에서 만나 최대 1시간 얘기를 들을 수 있다. 허씨는 "저처럼 가족이 아프고, 돌봄에 힘들어 본 사람들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위로를 받았으면 해서 휴먼북이 되기로 자원했다"고 말했다.

최근 전국적으로 이런 휴먼북 서비스를 도입하는 곳이 늘고 있다. 노원구가 지난 2012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장기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울·고립 등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자 그 대안 중 하나로 주목받으며 전국 주요 지자체로 확산 중이다. 지난 3년간 30여 곳의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이 사업을 시작했고, 국립중앙도서관도 최근 이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한 유명 플랫폼 기업에서 일했던 이현주(49)씨는 지난 2010년 첫째 아이를 낳은 후 육아휴직을 했는데, 회사에서 보직을 마련해 주지 않아 졸지에 경력 단절 여성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노원구립도서관의 휴먼북이 되어 이 경험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 이씨는 "경력 단절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저를 찾아온 여성과 함께 펑펑 운 적도 있다"면서 "제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고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18년 전 누나가 극단선택 하는 일을 경험한 정규환(37)씨는 서울시립대가 운영하는 서울 휴먼라이브러리의 휴먼북이다. 그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살아 당시 누나가 유일한 버팀목이었는데, 그를 잃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정씨는 "과거의 저처럼 방황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싶다"고 했다.

전국 곳곳의 휴먼북 중에는 이런 상담뿐만 아니라 교육이나 여행 등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례도 많다. 대부분 자원 봉사다. 군 생활 경험을 이야기하며 함께 진로를 고민하고, 세계 일주 경험을 공유하는 휴먼북도 있다. 휴먼북 독자들은 "사람과의 대화에서 정을 느낄 수 있고 생생한 경험을 듣고 질문도 할 수 있어 좋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주부 전미숙(44)씨는 "지인에게도 터놓기 어려운 고민들을 자연스레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했다. 기고자 : 서보범 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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