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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와 암흑의 우크라이나… 정철환 특파원 르포

지난 5월 이후 7개월 만에 다시 찾은 우크라이나에선 전쟁의 위협과 피로감이 한눈에 느껴졌다. 13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서부 관문 도시 르비우와 수도 키이우를 연결하는 550여㎞의 E40 도로엔 지난 10개월간의 공습 흔적이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폭격으로 푹 파인 도로 곳곳이 보수 중이었고, 길옆엔 흉하게 불타거나 망가진 건물이 눈에 띄었다. 고속도로 위 표지판은 대부분이 파괴돼 성한 것이 드물었다. 러시아 침공 이후 계속된 연료 부족 탓인지 도로 주변 주유소는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이따금 대형 자주포와 탱크를 실은 트럭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동쪽을 향해 달려갔다. 도로 한쪽에 우크라이나어로 '위험! 무인기(드론)를 발견하면 신고하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수도 키이우로 가는 도중에 거친 서부 도시 리우네는 13일 해가 지자 온통 암흑천지가 됐다. 경찰서와 주유소, 상점 몇 곳을 빼고는 불 켜진 곳을 찾기 힘들었다. 25만명이 사는 주도(州都)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전력 부족으로 가로등과 신호등도 대부분 꺼져 있었다. 잠시 쉬려고 들른 리우네 시내 초입의 한 호텔은 낡은 디젤 발전기 한 대에 의존해 희미하게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호텔 매니저 다닐료(31)씨는 "도시 전체가 단전 상태라 난방이 잘 안 되는데 괜찮겠느냐"고 몇 번을 물었다. "괜찮다"는 대답을 여러 차례 한 다음에야 객실 열쇠를 건네받았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발전기로 유지되던 조명이 꺼졌다. 영하 10도 추위 속에 라디에이터가 차갑게 식으면서 냉기가 방안으로 금세 파고들었다. 손전등과 온수 주머니를 나눠주던 호텔 직원이 "공습 경보가 울리면 지하 1층 식당으로 바로 모여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하늘에서 '투루루루' 하는 엔진 소리가 들리면 러시아 무인기"라고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미사일과 드론 공격만이 아니었다. 석 달째 거의 매일 이어지는 러시아의 집요한 전력 기반 시설 공격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추위와 어둠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전체 전력망 절반 이상이 파괴됐고, 전력 공급은 기존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수도와 난방 등 다른 사회 기반 시설까지 동시에 파괴되면서 우크라이나 지방 도시들은 도시 기능 자체가 마비될 위기에 몰렸다.

리우네에서 만난 올렉시(50)씨는 "전기와 물은 하루 4시간, 난방은 하루 2~3시간 겨우 나온다"며 "우린 러시아와 겨울이라는, 두 개의 적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서방이 지원하는 무기와 물자를 키이우와 남동부 전선까지 실어 나르며 우크라이나의 '생명줄' 역할을 해온 철도망도 큰 타격을 입었다. 13일 오전 9시 45분 폴란드 국경 도시 프셰미실(우크라이나명 프레미시우)에서 르비우행 기차를 탈 예정이었다. 하지만 열차는 11시가 넘었는데도 플랫폼에 나타나지 않았다. 역무원은 "키이우에서 열차가 도착해야 방향을 바꿔 다시 운행할 텐데, 전력난으로 기차가 서행(徐行)하는 데다 공습으로 중간중간 계속 서는 통에 더 늦어진다"고 했다.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 열차 착발(着發) 안내 화면은 모조리 꺼져 있었다. 역 경비를 담당하는 폴란드 장교는 "(보안 때문에) 열차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며 "언제 도착할지 예상조차 힘들다"고 했다.

예정보다 3시간 이상 연착한 열차는 오후 1시 넘어 승객 400여 명을 태우고 출발했다.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 측 철도 검문소를 통과하자, 갑자기 열차 속도가 느려지더니 객실 내 조명도 모두 꺼졌다. 열차 왼편에는 폭격으로 파괴된 듯한 건물과 변전소 시설이 보였다. 군복을 입고 권총으로 무장한 차내 보안요원은 "언제든지 미사일이나 드론이 (열차 주변에)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오후 2시 40분, 우크라이나 전역에 공습경보가 발령되자 기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프셰미실에서 르비우까지 100㎞ 남짓을 지나는 데 4시간이 걸렸다.

열차 승객 중엔 외국인도 많았다. 독일의 발전 설비 업체 엔지니어인 헨드릭슨(40·가명)씨는 "전력망 복구를 위한 기술 자문 역할로 르비우에 간다"고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력망은 옛 소련 시절 만들어져 러시아가 주요 시설물 위치와 약점을 너무나 잘 안다"며 "이 때문에 러시아의 공격에 너무나 쉽게 노출돼 있다"고 했다. 알렉세이(38)씨는 70대 후반인 부모님을 만나러 혼자 우크라이나로 가는 길이었다. 유대계 우크라이나인으로 15년 전 이스라엘로 이민해 귀화했고, 아이 셋을 둔 가장이다. 그는 "러시아 침공 얘기가 나올 때부터 부모님을 이스라엘로 모시려고 했는데 '고향을 떠나기 싫다'는 두 분 고집에 기회를 놓쳤다"며 "이번이 아마도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만나는 기회일 듯하다"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 3일간 비행기·열차·렌터카를 갈아탄 끝에 14일 새벽 4시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도착했다. 호텔 체크인 후 잠시 눈을 붙였을 때인 오전 6시 30분쯤, 두 번의 폭발음이 키이우 시내에 울려 퍼졌다. 우왕좌왕하는 투숙객들 사이로 뒤늦게 대피 방송이 나왔다. 그 후 오전 8시쯤 키이우시 당국의 공식 발표가 나왔다. "키이우 시내 셰우첸키우스키 지구의 모처(某處)를 노린 러시아의 무인기(드론) 공격이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호텔에서 직선거리로 800여m 떨어진 피격 장소를 찾아가 보니 폭격당한 화력발전소가 있었다. 굴뚝이 여러 개 있는 건물 상단 일부가 무너져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주변 건물도 여러 채 피해를 입은 듯했다. 관공서로 추정되는 10층짜리 건물은 꼭대기층 중간 부분이 부서져 쑥 들어가 있었다. 인접한 우크라이나 전력 업체 우크르에네르고의 본사 건물도 유리창 상당수가 깨졌다. 근처를 지나던 이 회사 직원에게 "오늘 새벽 공격으로 생긴 피해냐"고 묻자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다행히 오늘은 큰 피해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 수십 차례의 공격을 받아 일상이 됐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픽] 정철환 특파원 이동 경로 기고자 : 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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