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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名지휘자 파보 예르비,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과 내한

11일 서울 마곡 LG아트센터. 에스토니아 출신 명지휘자 파보 예르비(60)는 관객들의 박수가 채 멎기도 전에 무대에 오르자마자 지휘봉을 치켜들었다. 이날 후반 연주곡은 베토벤 교향곡 8번.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베토벤과는 사뭇 달랐다. 불굴의 투지와 역경 같은 영웅적 면모 대신에 지극히 경쾌하고 날렵한 베토벤이 흐르기 시작했다. 관성적으로 흘러가는 법 없이 강약과 완급의 조절을 통해서 응축과 폭발을 거듭하면서 교향곡 전체를 통째로 재조립하는 모습은 '소리의 공학자(工學者)' 같았다.

예르비는 악단 한두 곳으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 거장. 독일 브레멘의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과 스위스 취리히의 톤할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고, 고국에서는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직접 창단했다. 현재 일본 NHK 심포니의 명예 지휘자도 맡고 있다. 물론 비결이 있다. 준비와 체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오페라는 좀처럼 지휘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의 관현악에 '선택과 집중'을 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악단 임기가 끝날 즈음이면 곧바로 차기 행선지를 발표해서 '경력 공백'이 거의 없다.

이번 내한 공연은 거장의 일하는 비결을 엿볼 기회가 됐다. 그와 동행한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은 2004년부터 예르비와 호흡을 맞춰 온 악단. 이날도 기존 대형 오케스트라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40여 명만이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중후한 중형차 대신에, 차체(車體)는 작지만 불필요한 부품을 덜어내고 스피드를 한껏 끌어올린 경주용 차량에 올라탄 듯한 짜릿한 속도감이 있었다. 전반의 하이든 교향곡 96번 '기적'에서도 정치(精緻)한 앙상블을 통해서 자유자재의 완급 조절과 흐름을 빚어내는 예르비의 해석이 돋보였다. 반대로 클라라 주미 강과 협연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협연자의 섬세하고 유려한 바이올린을 철저하게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LG아트센터는 테헤란로 역삼동에서 마곡으로 둥지를 옮긴 뒤 지난 10월 개관했다. 지난 10월 런던 심포니의 개관 공연 당시에는 풍성한 잔향보다 직접음(直接音)이 두드러졌지만,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의 이날 공연에서는 절반쯤 비워내고 덜어낸 사운드가 오히려 시원한 청량감을 빚어냈다. 1335석 규모의 공연장에서는 대형 오케스트라보다는 조금 더 작은 규모의 공연이 어울릴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의 내한 공연은 13일 경기아트센터, 15일 서울 예술의전당으로 이어진다. 기고자 :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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