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참사 골목 바로 옆 화장품 가게서 내일까지 15팀 추모 음악회

지난 15일 오후 7시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인근의 한 화장품 매장. 색색의 비누와 입욕제 향기가 가득한 99㎡(약 30평) 규모 매장 한복판에는 검은색 피아노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푸른색 티셔츠에 의사들이 입는 흰색 가운을 걸친 한 남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피아노 앞에 앉았다. 50대쯤으로 보인 이 남성은 묵념하듯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더니 조심스레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곡이었지만 2분가량의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매장 안 손님이나 가게 앞 행인들이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봤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잠시 주변이 환해진 느낌이 들었다. 말을 걸었지만 그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갔다.

지난 13일부터 이 가게에는 피아노 선율이 매일 울려퍼진다. 이 가게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난 골목 바로 옆 해밀톤호텔 1층에 있다. 매장을 운영하는 업체는 인근 상점들과 함께 참사 직후부터 이달 12일까지는 휴업을 했다. 13일 다시 문을 열면서 시민들이 자발적인 추모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매장 안에 피아노를 가져다뒀다고 한다.

중년 남성의 연주 1시간 전에는 재즈 피아니스트 고희안씨가 재능 기부로 20여 분간 피아노 연주를 했다. 고씨가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somewhere over the rainbow)' 등을 연주하자 2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음악을 들으며 시민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가게 바로 앞에 마련돼 있는 참사 희생자 추모 공간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 매장에서는 재능 기부 등으로 오는 20일까지 하루 2차례 총 15팀이 추모를 위한 작은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

대형 참사가 일어난 곳 바로 인근이다 보니 이태원역 1번 출구나 해밀톤호텔 주변은 낮에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듯한 침울함에 휩싸여 있다. 추모하러 온 시민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하지만 잔잔한 피아노 선율 몇 소절이 이 거리에 기운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경기 부천에서 왔다는 장모(58)씨는 "서울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추모 현장을 왔는데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가엾게 목숨을 잃은 어린 친구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며 "피아노 선율을 들으니 마음이 잔잔해지며 더 차분하게 떠난 사람들을 추모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 용산구에 사는 임수진(34)씨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음악으로 느낄 수 있는 위안을 받았다"며 "이태원을 좋아하기도 하고 참사가 가슴 아파 하루 이틀 간격으로 매일 찾아왔는데 이제야 안식을 찾는 느낌"이라고 했다.

대형 참사가 일어난 자리 바로 옆이다 보니 용기 내 피아노 앞에 앉는 일반 시민들이 많지는 않다. 다만 매장의 한 직원은 "추모의 뜻으로 피아노를 쳐도 되느냐고 묻는 분들은 많이 있다"고 했다. 지난 16일에는 5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피아노가 놓인 이 매장 정문 앞에서 자기가 들고 온 색소폰으로 연주를 하는 일도 있었다. 기고자 : 김승현 기자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462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