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부산에는 나의 소울 푸드가 몇 가지 있다. 밀면, 돼지국밥과 복국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부산 사람들은 항상 이런 음식들을 먹고 살아?" 나는 "서울 사람들은 항상 평양냉면이랑 불고기를 먹어?"라고 반문하고 싶지만, 젠장. 사실은 사실이다. 부산 사람들은 꽤 자주 그 음식들을 먹는다. "한국인은 매일 김치를 먹어?"라는 외국인 질문에 "분하지만 사실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도 비슷하다.

오랜만에 부산의 복국집에 갔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옆 테이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처음 부산으로 놀러 온 젊은 서울 커플이었다. 그들은 갓 나온 복국 국물을 맛보더니 감탄했다. "복국은 처음인데 너무 시원해". 그러더니 복국을 엄청난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멈춰!'라고 외쳤다.

부산 복국집 테이블에는 빠짐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양념통이 하나 있다. 식초다. 복국은 다른 생선탕에 비해 원래도 깔끔하고 시원한 편이다. 식초를 넣으면 국물이 한층 개운해진다. 어느 정도 넣냐고? '이건 너무 많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양의 세 배 정도 넣으면 딱이다. 서울 커플은 식초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나의 오지랖력(力)이 숯불 위 꼼장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식초를 넣으면 더 맛있다고 말할까? 모르는 사람이 감 놔라 배 놔라 한다고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그래도 식초를 넣으면 복국 첫 경험이 훨씬 강렬해질 텐데?

나는 포기했다. 개인의 영역을 침범해 조언을 하는 일은 점점 예의에 어긋난 일로 간주된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시대다.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은 꼰대의 자질로 여겨진다. 그래서 중년의 당신은 소처럼 되새김질만 하다가 삼킨 충고들을 떠올리며 '젊은 세대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조언하는 법' 따위를 검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후회한다. 식초를 넣으라고 말했어야 했다. 넣고 말고는 그들이 결정할 일이다. 그래도 식초를 넣으면 더 맛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정도는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 그들은 사적 공간을 침범한 아재의 조언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 기회가 오면 '식초를 한번 넣어볼까?'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고는 말할 것이다. "그 아재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네."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복국집에서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실례합니다만 아세트산은 재료의 신선도를 끌어올리고 숨은 감칠맛을 더해줍니다. 특히 맑은 생선 국물과 궁합이 좋지요.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려 보는 건 어떨까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완전히 입을 닫는 건 훌륭한 어른의 자질이 아닐 것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우리보다 어린 세대에게 꼰대다. 꼰대가 되는 걸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과학적 꼰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 글을 쓰는 꼰대가 이 글을 읽는 꼰대들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과학적 조언일 것이다. 기고자 : 김도훈 문화 칼럼니스트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420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