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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때 가세가 갑자기 기울었다. 아버지 사업이 무너졌다. 이전과는 다른 궁핍한 삶이 시작됐다. 생각이 많은 고등학생 시절 마음을 가다듬으며 공부에 힘쓰던 곳이 북촌의 정독도서관이었다. 가락국수를 먹으며 심기일전했다. 그때가 아련하다.

지금도 누구와 상의하기 어렵고 경영자로서 혼자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있으면 정독도서관을 찾는다. 건물과 앞뜰이 40년 전 모습 거의 그대로다. 30분 정도 혼자 도서관 앞뜰을 걷고 10대 시절처럼 가락국수를 먹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어린 시절 어려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도서관은 인생에서 어려운 순간에 힘이 되어주는 장소였다. 그리고 지식을 보강할 수 있는 배움터이기도 하다. 지적인 에너지를 채워주기 때문에 도서관에 갈 때마다 보물창고에 들어온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된다.

주말에는 용산에 있는 집에서 나와 경의선 숲길을 90분 걸어 성산대교 북단의 마포중앙도서관에 간다. 즉석에서 다양한 책을 집어들어 지식을 보충한다. 금융권에 몸담고 있으니 다른 분야의 지식을 보충한다. 과학 잡지를 꺼내 들어 바이오 산업의 동향을 익힌다. 경제 주간지에서는 반도체·조선·자동차 산업의 흐름을 훑어본다. 우주를 다룬 책에 실린 지구 밖 세계 이야기를 머릿속에 채워넣는다. 신기술을 소개한 책들도 흥미롭다. 뇌에 생기가 도는 것 같다.

세상의 빠른 변화나 앞서 살다 간 현인들의 삶을 다룬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통찰을 얻을 수 있어 즐겁다. 은행 경영에 접목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확장된다. 마포중앙도서관에서는 가끔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한다.

코로나 사태가 한창이라 답답할 때는 종종 하나은행 본점 7층에 있는 사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직원들과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비대면으로 나누는 '다독공감'이라는 사내 프로그램을 즐겁게 운영하고 있다.

은행원이라는 진로를 선택해 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도서관이라는 공간이다. 대학 시절 교내 도서관에서 시를 읽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한 책도 읽었다. 영생을 다룬 다소 엉뚱하거나 기발한 책도 즐겼다. 그러다 졸업을 앞두고 어떤 일을 해볼까 궁리 끝에 도서관에서 긴 막대기에 철해놓은 신문 1년 치를 읽었다. 금융업에서 길을 찾고자 했는데, 신문을 쭉 읽어보니 조그마한 곳에서 출발해서 성장해도 좋겠다는 답을 얻었다. 그래서 하나은행의 전신인 한국투자금융에 들어갔고, 34년이 흘러 지난해 행장이라는 과분한 자리까지 왔다.

인간이 창의성을 끌어올리려면 자기만의 생각할 공간이 필요하다. 일상에만 매몰돼 있으면 생각이 갇히게 된다. 엉뚱한 생각도 해봐야 다른 관점에서 현안을 볼 수 있다. 스스로를 극복하고 담대한 자아를 만드는 공간이 내게는 도서관이었다. 고민 많던 사춘기 고등학생 시절부터 경영자가 된 지금까지 40여 년간 도서관에서 생각의 범위를 넓혀 왔다. 도서관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기고자 : 박성호 하나은행장 정리=손진석 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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