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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생각과는 달랐다. 내가 살던 동네는 자메이카, 인도 이민자가 많았다. 주말이 되면 자메이카 출신들이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우며 레게 음악을 틀었다. 24시간 카레 배달 전문점은 내 삶의 구원자가 됐다. 기대했던 영국은 윗입술을 내밀고 BBC 발음으로 폼 잡는 백인 세상이었다. 진짜 영국은 다양한 이민자 세상이었다.
살다 보니 영국은 미국처럼 인종차별이 가시적으로 심한 동네는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 직원들은 인종이 놀랄 만큼 다양했다. 눈에 보이는 차별은 없었다. 대신 나는 깨달았다. 영국은 계급사회였다. 아이들 미래는 특정 계급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노동계급 출신들은 계급을 넘어 출세할 생각조차 없었다.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혹은 행복하다고 자조하는) 개천이었다.
리시 수낵이 영국 총리가 됐다. 영국 발음으로는 '수낙'이다. 한국은 모든 영어 단어를 미국식으로 표기한다. 왜 수낙을 캘리포니아식으로 수낵이라 불러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겠는가. 한국인에게 외국이란 대개 미국을 의미한다. 우리는 서구의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마저 미국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수낵이 총리가 되자 기사가 쏟아졌다. 몇몇 기사는 "인종차별의 장벽을 넘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미국식 해석이다. 영국의 진정한 문제는 인종차별이 아니라 계급 차별이다. 수낵은 젊은 시절 "노동계급 친구가 없다"고 말한 적 있는 최상위 계급 출신이다. 명문 사립고와 옥스퍼드대를 나왔다. 재산은 우리 돈으로 1조원이 넘는다. 그는 영국으로 들어오는 난민 수를 줄일 계획을 갖고 있다. 불법 난민 감시와 구금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주요 장관직은 모두 남성으로 뽑았다. 수낵을 설명할 때 인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강경한 최상위 계급 보수당 남성이다.
정의당이 위기에 처하자 두 의견이 충돌했다.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의 충돌이었다. 누구는 성 소수자, 여성 등 정체성에 몰두하는 정치가 계급 문제를 무시한다고 했다. 누구는 고리타분한 노동운동이야말로 다양성을 무시한다고 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다. 어떤 지점에서는 정체성이 중요하다. 어떤 지점에서는 계급이 중요하다. 둘은 교차한다. 그 복잡한 교차로를 이해하는 것이 21세기의 정치다.
나는 스파이스 걸스의 'Wannabe'를 들으며 이 글을 쓰는 중이다. "내 애인이 되고 싶다면 내 친구들과 잘 지내야 해. 우정은 영원하니까". 그렇다. 결국 당신의 모든 것은 정체성도 계급도 아닌, 당신을 둘러싼 친구의 종류가 결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 친구를 브랜드 아파트와 임대아파트 거주자로 나누는 당신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기고자 : 김도훈 문화 칼럼니스트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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