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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에는 엔진이 없다. 벤츠나 BMW 같은 100년 자동차 기업들의 기술력과 노하우가 축적된 엔진 대신 배터리와 모터의 힘으로 달린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골프장 카트나 한강공원의 소형 방범차 용도로 여겨지던 전기차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을 상상이나 했겠나. 전기차의 확산 속도를 보면 엔진 자동차가 박물관에 들어갈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엔진 없는 전기차의 등장은 새로운 경쟁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벤츠나 도요타·현대차 같은 명문(名門) 자동차 기업들과 출범한 지 20년도 안 된 중국 전기차 기업들, 스타트업들을 모두 같은 출발선상에 세운 것이다. '엔진은 자동차의 심장'이라고 자랑해온 기존 완성차 기업들의 기득권은 사라지고, 애플이나 삼성전자도 마음만 먹으면 엔진 없는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수제(手製) 엔진을 만드는 장인 정신보다 '로봇이 모든 차를 자동 생산한다'는 테슬라의 모토가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전기차의 개막과 맞물려 또 하나 놀라운 산업계의 변화는 대만 TSMC가 상징하는 파운드리(foundry) 반도체의 부상이다. 파운드리는 주조·주물 공장을 뜻하는 어원(語源)에서 엿볼 수 있듯이, 10년 전만 해도 고객사가 만들어준 설계대로 반도체 생산을 대행하는 2류 취급을 받았다. 그런 TSMC가 올해 반도체의 제왕인 인텔과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이 됐다. 놀랍게도 TSMC는 3년 전만 해도 매출이 삼성 반도체의 60%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후 매년 20~30%씩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다. 호황과 불황을 오가는 메모리와 달리, 줄곧 우상향 성장세다. 영업이익률(매출액 대비 영업이익의 비율)이 무려 50%로, PC 시절 극성기를 누렸던 인텔을 능가한다. 자동차가 자율주행·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이 망라된 전자제품으로 변해가면서 세계 반도체 산업의 지형도까지 바뀐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산업계의 대전환은 1990년대 말 디지털 전환기의 데자뷔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당시 디지털 전환기는 전 세계 제조 기업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삼성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CDMA(미국식 디지털) 이동통신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해 세계 최대의 IT 제조 기업으로 성장한 반면, 일본 소니는 아날로그 1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1990년대 중반 세계 최초의 폴더폰 '스타택'을 출시해 전 세계를 열광케 했던 미국 모토로라도 디지털 전환을 미루다가 핀란드 노키아에게 왕좌를 내준 뒤 쇠락하다가 중국 기업에 매각됐고, 그 노키아는 터치식 스마트폰 개발을 외면했다가 애플·삼성에 치명타를 입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의 전환기도 승자와 패자를 낳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기업 경쟁력만 보면 지금이 과거 디지털 전환기보다 훨씬 낫다는 점이다. 현대차가 전기차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것 외에도 삼성·LG 등 한국 기업들은 2025년 메모리 반도체 시장만큼 커질 것으로 예상하는 전기차 배터리, 전기차 구동의 핵심인 모터 기술, 자율주행 카메라와 센서, 인포테인먼트 부품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세탁기를 구동하는 LG전자의 모터 기술이 전기차로 연결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게다가 중국이 우리를 쫓아올 때마다 제재를 가해주는 미국도 있다.

하지만 우려되는 대목도 적지 않다. 파운드리 반도체는 TSMC에 주도권을 뺏겨버렸고 TV와 스마트폰도 전성기를 지났다. 게다가 30년 만의 초(超)인플레이션으로 내로라하는 대기업들마저도 투자금 조달을 못하는 심각한 자금 경색에 처해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자가 기존 기업들을 축출하는 '파괴적 혁신'이 가속화하면 수많은 패자들만 양산할 수 있다. 일시적으로 고용이 급감하거나, 지금 조선 업종에서 나타나고 있는 원청·하청 기업 근로자 간의 임금 양극화가 자동차 산업에서도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사회에는 위기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IMF 외환 위기 때 맞은 디지털 전환기에는 정치권과 경제계 리더들 사이에 위기의식은 있었다. 기고자 : 조형래 산업부장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2005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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