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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잔 속 찰랑이는 갈색 파도… 압도적인 맛으로 중추를 때리네

남자의 굵은 팔뚝이 레버를 당겼다. 20년은 됐을 법한 빨간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짙은 갈색 액체가 흘러나와 작은 잔에 담겼다. 에스프레소가 찰랑였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짠 내 섞인 바닷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맞으며 에스프레소를 홀짝였다. 압도적인 맛의 두께는 신경계 중추를 때리는 충격이었다. 이 커피를 매일 마시는 사람들은 다른 감각 체계를 지닐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에스프레소란 커피 그 자체이자 생활의 필수품이요 영혼의 양식이다. 나폴리에서의 기억을 좇아 한국에서 에스프레소를 찾으면 직원은 질문을 던졌다. "커피 원액인데 괜찮냐"는 공손한 확인이었지만 실은 "주문 잘못 넣은 것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그 질문이 요즘은 뜸하다. 이 나라에는 지금 9만 개에 가까운 카페가 있다. 커피 문화도 그 숫자만큼 발전했다. 에스프레소를 전문으로 파는 곳도 꽤 생겼다.

에스프레소에 정성을 쏟는 곳을 찾으려면 '빈브라더스'에 가봐야 한다. 서울 합정역에서 양화진 역사공원 방면 이면도로에 들어선 빈브라더스는 카페 중앙에 원목으로 짠 주방이 있었다. 에스프레소만 시킬 수도 있지만 '원앤원(One & One)'이라는 메뉴를 꼭 마셔봐야 한다. '피콜로 라테'라고 부르는 작은 카페라테와 에스프레소 한 잔, 탄산수를 함께 낸다. 원두도 산미가 강한 쪽, 초콜릿 향이 두드러지는 쪽 등 두 종류가 있다.

두유를 마시는 것처럼 고소한 풍미가 퍼지는 카페라테는 작은 양을 마시니 그 맛이 더 정확하게 느껴졌다. 카페라테를 큰 컵에 음료수처럼 담아 마실 때는 배도 부르거니와 마시는 시간이 길어져 온도도 계속 떨어진다. 밝은 갈색 에스프레소는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처럼 매끈한 맛이었다. 쓰다기보다 농축되었다고 말해야 옳은 커피 향이 교감신경을 곤두세웠다. 탄산수를 뒤이어 마시니 입에 남은 잔맛이 사라지고 상쾌한 기운만 남았다.

한강을 따라 강동에 가면 성내동에 '맥그레고르'라는 카페가 있다. 빨간 벽돌 건물을 멀리서 봤을 때 영국 어느 시골에 온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바 카운터가 길게 놓였고 손님들은 그 주변에 고양이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이 집은 강하게 볶아 산미를 줄인 강배전 원두에 레버를 돌려 커피를 뽑는 수동 머신을 썼다. 커피에 산미를 살리게 되면 차를 마신 것처럼 향긋한 느낌이 든다. 그만큼 맛의 무게감이 떨어져 에스프레소에서는 어색할 수도 있다.

주인장의 취향은 확고했다. 강배전 원두를 쓰는 만큼, 모든 에스프레소 음료에 기본적으로 설탕이 들어갔다. 이탈리아에서도 절반 이상이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타서 마신다. 에스프레소 2샷에 데운 우유를 조금 섞은 '코르타도(cortado)'는 이 집의 대표 메뉴다. 얇지만 단단하게 뜬 거품의 푹신한 질감이 입에 느껴졌다. 단단하게 밑을 받친 단맛, 그 위에 올라탄 커피의 짙은 향은 전동 드릴로 박아 넣은 나사처럼 이음새 없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

마포 신수동에 오면 얼마 전 문 연 '로익스 커피'가 있다. 마포소방서 뒤쪽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이면도로에 자리한 이 집은 직사각형 통창으로 안을 훤히 드러냈다. 손님을 맞는 매장이 한쪽, 나머지 한쪽은 원두를 볶는 작업장이었다.

주인장 둘은 손님의 주문이 끝나면 좁은 주방에서 어깨를 맞대가며 원두를 갈고 커피를 뽑고 맛을 봤다. 각도를 재고 표적을 확인하는 포병처럼 맛의 궤적을 정확하게 끌어내려 했다. 에스프레소 위에 초콜릿 파우더와 수제 초콜릿을 올린 '카페 마로키노'는 한입 머금자 초콜릿 속에 빠져들어간듯 빽빽한 밀도의 맛이 혀를 덮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돌려 하지 않는 정직한 연인의 밀어(密語)처럼 맛에 복선이 없었다.

크림에 원당을 넣고 거품을 일으켜 단단한 물성을 만든 후 커피 위에 올린 '에스프레소 콘 판나'는 차갑고 달콤한 크림이 에스프레소와 대비되었다. 잔을 비우자 저녁 바람에 차갑게 식은 손을 데워주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닿은 듯 가슴 한편이 녹아 내렸다.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는 시간을 때우는 느긋한 음료가 아니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힘을 만들고 망설이는 마음에 추동력을 주는 연료 같은 것이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옮기다 보면 저절로 눈이 감겼다. 남국의 태양, 더운 피, 감미로운 숨결, 달콤한 시작, 잊히지 않는 마지막, 사랑 그리고 후회, 그 모든 것들의 다른 이름이 에스프레소였다.

#빈브라더스 합정: 원앤원 6500원. (0507)1428-2001

#맥그레고르: 코르타도 4000원. (0507)1434-8509

#로익스 커피: 카페 마로키노 3800원, 에스프레소 콘 판나 3800원. (02)6949-1248 기고자 :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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