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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힘듦 불태우려 마셨다 정신 번쩍 드는 이 맥주를

며칠 전 예능 프로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봤다. 영화배우 겸 예능인 L이 분위기를 잡으며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었다. 개그맨 K가 등장하며 찬물을 끼얹기 전까지. 요즘은 '에쏘빠'가 대세라며, 한술 더 떠 르완다 조스틴(?) 품종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에쏘빠는 '에스프레소 바'를 거세게 발음해 줄인 것이고, 르완다 조스틴은 '르완다 저스틴'으로 르완다의 저스틴이라는 생산자의 커피라는 뜻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에스프레소가 마시고 싶지 않았다.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L이 분위기를 잡긴 했으나 전혀 그윽하지 않았고, 나는 좀 더웠다. 더우면 맥주 아닙니까? 여름 내내 마시던 라거나 IPA 대신 다른 맥주를 마시고 싶다. 가을에 어울리는 맥주를 말이다. '에쏘빠' 장면을 보다가 알았다. 커피 맥주가 마시고 싶다는 것을.

스타우트나 포터 같은 진한 색깔의 맥주여야 한다. 커피 맥주의 근간이 되려면. 스타우트나 포터의 짙은 색깔과 육중한 맛은 커피와 상응하니까. 황금빛의 라거나 그보다 더 색이 연한 바이젠이라면 곤란하다. 밝고 투명하게 빛나는 이 맥주들은 찬연한 그 색을 마시기도 하는 것인데 커피를 탄다면 어떻게 되겠나? 맛의 균형도 깨지지만, 색도 곤란해진다. 이도 저도 아닌 비에 젖은 볏단 색이 될 것이고, 그런 축축한 색은 목구멍으로 넘기고 싶지 않다.

슈바르츠 비어도 좋다. 독일어로 '검은 맥주'라는 뜻의 이 맥주는 아일랜드의 흑맥주인 기네스와 비슷한 듯하지만 다르다.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주인공 한스는 이 흑맥주를 아침마다 한 잔씩 마신다. 소설에는 그저 '흑맥주'라고 되어 있지만, 뤼베크 태생으로 뮌헨에서 오래 산 그가 소설에 쓴 흑맥주는 튀링겐과 작센의 흑맥주인 슈바르츠 비어가 아닐까 싶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신경을 마비시키며, 멍한 기분이 들게 한다면서 한스는 흑맥주를 마신다. 어쩌다 한 번 마시는 게 아니라 거의 고정된 아침 메뉴다.

나는 이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좋아하는 부분을 끝없이 나열할 수도 있는데, 이 부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체질에 좋다고 해도 그렇지 아침마다 맥주를 마시면 너무 나른하지 않을까 싶었기에.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커피를 탄 흑맥주가 아니었을까라고. 아일랜드 위스키에 휘핑크림을 얹은 커피인 아이리시 커피처럼, 또 초콜릿과 에스프레소, 우유 거품을 얹은 이탈리아 토리노의 비체린(Bicerin)처럼 한스의 흑맥주란 슈바르츠 비어에 커피를 넣은 '특제 맥주'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커피 맥주란 소프트한 예거밤이 아닐까도 싶다. 예거밤이란, 예거마이스터라는 독일의 약초 맛이 나는 리큐르와 레드불(!)을 섞은 칵테일이다. 예거밤을 마시고 나서 이 밤이 'bomb'이라는 걸, 그러니까 나는 지금 '예거 폭탄'을 마셨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 음료의 속성에 대해 생각했다. 술은 이완제인데, 레드불은 각성제다. 이완제와 각성제를 섞어 마셨다는 자각이 들자 머리가 환해졌다. 양극성의 물질이 내 몸 안에서 널뛰고 있는 걸 느끼면서 이 기분 좋으면서도 동시에 기분 나쁜, 쾌와 불쾌가 한데 섞여서 나를 잡아당기는 당혹감을 감상했다. 그 강렬한 경험 이후로 예거밤을 마신 적이 없다.

하지만 커피 맥주 정도는 괜찮은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마셨다.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말이다. 할 일이 많아서 아침부터 몽롱하면 안 되는데, 나를 달래고 싶기도 하고, 동시에 정신이 번쩍 났으면도 해서.

작은 일탈에 기대어 사는 요즘이다. 그래, 이게 사는 기쁨이지라면서. 오늘의 힘듦은 오늘 불태워 버려야지라면서 한 모금 남은 커피 맥주를 마셨다. 기고자 : 한은형 소설가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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