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대주주들 상속세 부담에 주가 낮게 유지하려는 경향… 1400만 개인투자자가 손해, 부자 감세 프레임 벗어나야＂

고(故) 김정주 넥슨 창업자의 아내와 두 딸이 최근 국세청에 6조원대 상속세를 신고했다. 고인이 남긴 재산은 10조원대. 기본 상속세율 50%와 최대주주 할증(30%)이 붙어 총 65%의 세율을 적용받았다. 유족들은 주식 담보대출과 배당금 등을 동원해 10년에 걸쳐 세금을 나눠 내기로 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들도 삼성전자 주식 등을 팔아 12조원 규모의 상속세를 내기 시작했고, LG 일가는 9000억원, 롯데 일가도 3000억원가량의 상속세를 나눠 내고 있다.

'물려받는 재산이 많은데 그만한 상속세 내는 게 뭐가 문제냐'는 여론 속에 최근 이를 반박하는 새로운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경영권을 가진 대주주들이 세계 최고 수준인 상속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회사 주가를 낮게 유지하려고 하면서 상장 기업들의 주가가 실적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고질병처럼 굳어졌다는 주장이다. 상속·증여세는 상속·증여할 재산의 평가 금액에 세율을 곱해 정하는데, 세율을 낮출 수 없으니 주식 평가 금액을 낮춰서라도 세금 부담을 줄이고 있다는 것이다.

황승연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정·재계가 주최하는 각종 포럼과 세미나에서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고 국부를 창출하려면 상속세를 없애는 대신 '자본이득세'를 부과하면 된다고 말한다. 물려받은 주식을 팔아 이득을 챙길 때 세금을 물리면 대주주들이 상속세 줄이려고 주가를 낮게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대주주는 세금에, 소액주주는 주가에 관심

―사회학과 교수가 왜 상속세 문제에 목소리를 내게 됐나.

"베버나 마르크스는 사회학자이면서 정치가이자 경제학자였다. 우리 사회 체제와 근본 시스템에 대한 고민은 모두 닿아 있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 경영자들이 거의 예외 없이 감옥에 가는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기업인들만 더 탐욕적인가? 다른 나라 부자들보다 윤리 교육을 덜 받았나? 모든 사람이 법을 어길 정도면, 법과 제도를 고쳐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말로 상속세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인가.

"우리나라 상장회사들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0이 안 된다. 지금 가진 자산을 다 팔아도 시장가치(주가)가 거기에 못 미친다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살아있는 닭이 죽은 닭보다 비싼 게 정상이다. 산 닭은 알을 낳을 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산 닭이 잡은 닭보다 싼 상황이다. 지금 당장 회사를 청산한 것보다도 주가가 싸다는 건 미래가 없다는 뜻이다.

회사가 잘돼도 굳이 알리지도, 기술개발에 투자하거나 배당하지도 않는 회사들이 많다. 많은 대주주가 50~60%에 달하는 상속세를 줄이려고 주가를 일부러 낮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주식시장이 저평가받는다는 의미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나.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미 알아차리고 많이 떠났고, 개인투자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작년 말 기준 개인투자자가 1384만명이나 된다. 2019년 대비 배 이상 늘었다."

―어떻게 주가를 일부러 낮게 유지하고 있는 건가.

"별도 회사를 세우고 일감 몰아주기, 회사 분할 후 이중 상장하기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최근에도 많이 일어나는 일들이다. 최대주주 지분율이 50%가 넘고 자사주까지 합치면 지분율이 80%인 A 기업은 (자산과 이익 등으로 산출한) 적정 주가가 현재 대비 5배에 달하지만, 주가는 내리기만 하고 있다. 주가가 낮아도 대주주로선 문제가 없다. 지분과 지위만 유지하면 되기 때문이다. 대주주의 관심은 세금이고 소액주주들의 관심은 주가인데, 이해가 상충한다. 이런 기업이 한두 개가 아니다."

세계 최고수준 상속세, 가업승계 막아

현행 상속세 과세 기준은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마련됐다. 당시 최고세율을 50%로 높이고 최고세율 과세표준 구간도 '50억원 초과'에서 '30억원 초과'로 강화해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3.5배, 전국 주택 시가총액은 6.5배 커졌다. 최대주주 할증을 감안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상속세 최고세율이 우리나라가 65%로 가장 높다. 그다음이 일본(55%)이다. OECD 회원국 중 상속세가 없는 나라가 15곳, 이들까지 합친 평균 상속세율은 14.5%다."

―상속세를 내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2011년부터 2020년 사이 연평균 30만~35만명이 사망했다. 상속세 대상은 평균 7000~9000명 수준이었다. 세금을 내야 하는 피상속인 규모가 사망자의 2~3%에 불과해 일반인들의 관심이 적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곧 일본처럼 대(大)폐업의 시대에 접어들면 모두의 문제가 된다. 일본은 2025년 전체 중소기업 400만 곳 중 60% 기업의 대표 나이가 70세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중 절반이 후계자를 찾지 못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비상장기업의 경우 상속 주식의 80%에 대해 납세 유예를 해주는데도 그렇다. 우리는 지금대로라면 상속세를 감당 못해 아예 회사문을 닫아버리는 '기업 소멸의 시대'가 올 수 있다. 잘못된 세금이 일자리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상속세율을 낮춰준다고 기업들이 승계를 위한 꼼수를 안 쓸까.

"세율을 절반 낮추면 일자리가 27만개 늘어난다는 연구도 있지만, 아예 폐지하고 자본이득세를 도입하자는 게 내 생각이다. 상속받은 재산 자체에 세금을 매기는 대신, 받은 주식이나 부동산 등을 매각해 현금화하는 시점에 발생하는 이익에 과세하자는 것이다.

스웨덴이 2005년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득세를 도입했다. 보수당 정권이 아닌 사민당 정권에서다. 우려와 달리 전체 세수가 증가해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모두가 위너(승리자)가 됐다. 그간 훼손된 자본시장 신뢰는 상법 개정을 통해 최고경영자나 이사들에게 주주보호 의무를 부여하면 나아질 걸로 본다."

상속세 폐지한 스웨덴, 모두가 원윈

―부자(富者) 감세라는 프레임, '국민 정서법'을 거스르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국회의원들이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인데, 이런 말 하면 나 떨어져요. 말 못해요." 이런다. 2020년에 사비 3000만원을 들여서 '전 국민 의식 조사'를 해봤다. '우리나라는 부자들의 세금 부담이 낮기 때문에 부자들에 대한 상속세를 더 올려야 한다'는 명제에 64.7%가 '그렇다'고 답했다. '아니다'라고 답한 국민은 14.9%뿐이다. 상속세를 없애면 매년 7000~9000명의 부자만 이득을 볼 것이라는 배 아픈 국민정서가 무서워서 이 법을 유지하다 보면, 매년 수십만 개의 일자리와 수백조원의 매출과 후손들의 미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들은 다양한 공제 혜택을 통해 상속세 부담을 가볍게 하는 추세다.

기업 상속에 대해 이런 비유를 들고 싶다. 제주도 사는 아버지가 서울 사는 아들에게 귤 장사 하라고 귤 한 박스를 보내주셨다. 우리나라는 귤이 제주에서 서울로 올 때 세금을 매긴다. 귤은 서울 와서 썩을 수도 있고, 안 팔릴 수도 있다. 귤 팔아서 돈을 벌었을 때 세금 매겨야지, 귤 옮겨왔다고 세금 매기는 건 불합리하다. 기업 주식은 썩을 수도 있는 귤이다."

상속세 폐지는 제2의 토지개혁

―상속 공제제도가 있다. 최근 정부가 공제 대상과 한도를 늘려주려 하는데.

"지난 2016~2020년 가업 상속 공제제도를 이용한 기업이 독일은 연평균 9995곳, 한국은 93곳뿐이다. 독일이 100배다. 이게 무얼 말하나.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제도가 너무 까다로운 데다 단순한 회계 실수라도 발견되면 징벌적으로 세금을 매기기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신청조차 못 하겠다고들 한다. 국세청이 돋보기 들고 다니면서 '사냥감' 다루듯 한다는 것이다. 과세 당국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 더 많은 기업을 오래 살릴수록 법인세가 늘어나 상속으로 걷는 세금 이상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될까.

"우리나라가 자본주의 자유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로 발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50년에 있었던 토지개혁이다. 농민이 토지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받은 북한과 달리, 남한은 유상 매입, 유상 분배의 농지개혁법을 통해 농지의 96%를 농민이 소유하게 됐다. 이게 부를 창출하는 기반이 됐다.

지금은 기업이 부를 창출하는 기반이다. 주식시장을 통해 전 국민이 기업을 나눠 소유하고 기업의 주인이 돼야 한다. 하지만 징벌적 상속세에서 비롯된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 때문에 주가가 심하게 왜곡돼 국민의 건강한 기업 소유가 방해받고 있다. 상속 세제를 바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사라지고 우리나라 기업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대만 수준만 돼도 우리나라 주가는 5000포인트가 훌쩍 넘을 수 있다. 배 아픔의 치료에서 배부름의 유인으로,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한다."

☞황승연

1960년 부산 출생. 경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사회가 모순과 부조리 덩어리라 생각했는데, 독일 대학 첫 수업에서 '남한이 제3세계 발전 모델인가'를 놓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경희대에서 30년간 사회조사 방법론, 사회변동론 등을 가르쳤다. 지난달 말 명예 퇴직했다. 1995년 PC통신 천리안을 이용해 재택 수업을 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원격수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