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77) '심심한 사과'

    김규나 소설가

    발행일 : 2022.08.31 / 여론/독자 A33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평범한 단어들도 헨리의 머릿속에서는 혼돈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어떤 단어를 말하면 헨리는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이해하곤 했다. 그래서 그 단어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다. 한번은 무일푼 건달에게 시집간 딸 때문에 '가슴이 찢어졌다'는 어떤 불쌍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헨리는 여러 날 동안 가슴이 진짜로 찢어진 불쌍한 여자에게 쫓기는 악몽을 밤마다 꾸었다.

    - 로자문드 필처 '9월' 중에서

    마음 깊이 미안하게 생각하여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 업체에 더 큰 비난이 쏟아졌다. '심심한 사과를 드린' 탓이다. 뜻밖에도 많은 사람이 심심(甚深)을 지루함으로 잘못 이해했다. 한자 교육의 부재가 문제다, 문해력이 낮다, 무식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며 사회 일각의 한숨이 깊다. 반면,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어려운 말은 불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오래전 출판된 책들을 꺼내 보면 먼지와 함께 낯선 한자어가 잔뜩 쏟아져 나온다. 앙연(怏然), 설시(說示), 지실(知悉), 작량(酌量), 예모(豫謀)는 어느 외국 작가의 단편소설을 읽다가 뜻을 몰라 사전을 찾아본 낱말들이다. 왜 이렇게 어려운 말로 옮겼을까 싶지만, 1920년대 출생한 번역자의 세대에서는 당연하게 통용되던 말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 여덟 살 꼬마 헨리는 동음이의어나 처음 보는 단어, 문장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해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마다 부모와 주변 어른들은 이건 이 뜻이고 저건 저 뜻이라고 찬찬히 가르쳐준다. 아이는 그렇게 무지의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배움을 경험하고 지적 능력을 확장시키며 성장해간다.

    진화는 단순에서 복합으로 가는 일방통행로가 아니다. 언어의 발달은 인간의 지능을 폭발시켰지만 그 결과 탄생한 첨단 기기는 복잡한 말을 거부한다. 리모컨과 이모티콘, 단순 명령어와 간단히 줄인 말이면 충분하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유대는 단절되고 진화의 모래시계도 방향을 바꾸는 시대, 쉽고 단순한 것이 대세다. 좋든 싫든 언어도 예외는 아니다. 머잖아 다시 원시적 감정 표현만 남겨질지 모른다. "우가우가 우가차카!"

    기고자 : 김규나 소설가
    장르 : 연재
    본문자수 : 1090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