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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3) 교황의 사생아(애인을 통해 낳은 아이)가 무려 3명… 그 중 딸을 세차례나 정략결혼시켰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발행일 : 2022.08.30 / 여론/독자 A2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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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 알렉산데르 6세의 '막장 정치'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는 찬란한 문화 발전을 이루었으나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특히 15세기 말 로마는 '신성함도 법도 없고 오직 금과 폭력이 넘쳐나는 비너스의 제국'이라는 말이 돌았다. 흔히 타락한 교황의 대명사로 통하는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 그리고 딸 루크레치아는 이 시대 혼돈의 극단을 증언하는 사례다.

    알렉산데르 6세는 원래 에스파냐의 발렌시아 출신으로서 본명은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de Borgia)다. 일찍이 교계와 속계 양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다가 삼촌이 교황이 되자(갈리스토 3세) 로마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렇지만 그는 신심이 깊은 인간은 결코 아니어서, 추기경 직책을 수행할 때 카타네이(Vannozza Cattanei)라는 여인을 애첩으로 두었다. 두 사람은 조반니와 체사레라는 두 아들을 낳았고, 이어서 1480년 세 번째 아이인 딸 루크레치아를 얻었다. 딸마저 권력 추구의 도구로 삼은 로드리고는 고작 열한 살이었던 루크레치아를 두 에스파냐 귀족과 차례로 약혼시켰다. 상대방이 양다리를 걸친 상태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두 악혼자는 크게 분개했다.

    고작 11살에 두 귀족과 동시에 약혼

    다음 해인 1492년, 보르자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의 강국 밀라노와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루크레치아의 이전 약혼을 모두 파기하고 밀라노 공작의 조카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시켰다. 14년 연상인 남편과 한 정략결혼이 행복할 리 없다. 1493년, '교황님 댁 혼사'라는 이상한 성격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르기는 했으나 신혼부부는 전혀 애정이 없어보였다. 첫날밤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로 교황과 밀라노 공작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밀라노 공작은 프랑스 국왕과 결탁하여 나폴리로 공격해 들어가려 했고 교황이 이를 저지하려 했다. 루크레치아의 남편 조반니는 자기 삼촌(밀라노 공작)과 장인(교황)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립을 지키려 했다. 결국 프랑스군이 로마로 공격해 들어와서 산탄젤로성에 피신해 있던 교황이 항복하고, 프랑스 군이 나폴리까지 쳐들어갔다가 되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동안 사위 조반니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데다가 루크레치아에게 계속 냉랭한 태도를 보이자 교황은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다. 이혼이라는 게 불가능했던 시대이므로(결혼을 종교적 성사〈聖事〉가 아니라 계약 행위로 규정하고, 따라서 계약을 해소하는 이혼도 법적으로 가능하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의 결과다), 결혼이 원천 무효라고 선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성적 결합이 없었으며 그 원인은 조반니가 성적 무능력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개적으로 성적 무능력자 낙인이 찍힌 조반니는 악성 루머를 퍼뜨려서 보복했다. 교황이 자기 딸과 근친상간 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루크레치아를 빼앗아갔다고 주장하며 돌아다닌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했다가 다시 결혼 무효 처분을 당해 충격을 받은 루크레치아는 수녀원에 들어가서 아예 나오려 하지 않았다. 교황은 딸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시종 페드로 칼데스(Pedro Caldes) 일명 페로토(Perotto)를 보냈다. 22세의 젊은 남성 시종이 18세 이혼녀와 자주 만나 인생 상담을 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뜨거운 관계가 되었고, 루크레치아는 임신했다. 아마도 페로토가 그녀의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 내 살인이라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다. 작은오빠 체사레가 큰오빠 조반니를 암살하여 시체를 테베레강에 던져버린 것이다. 이처럼 포악한 성격의 체사레가 여동생의 임신 사실을 눈치채고 말았으니 이제 그녀의 애인 페로토의 목숨도 위태해졌다. 페로토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교황에게 달려갔으나 체사레는 단도를 쥐고 바티칸궁을 가로질러 그를 추격하여 교황이 보는 앞에서 그를 찔렀다. 그가 죽었는지 살아남았는지는 불분명하여 설이 엇갈리지만, 어쨌거나 루크레치아가 두 번 다시 페로토를 볼 수 없게 된 건 분명하다.

    이런 막가는 상황에서 교황과 체사레는 다시 루크레치아를 나폴리 왕의 서자인 아라곤의 알폰소와 결혼시켰다. 다행히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행복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빠 체사레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결탁하여 밀라노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서 나폴리 왕국까지 차지하려는 욕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자니 처남의 출신 국가인 아라곤과 관계가 악화되었다(나폴리 왕국과 아라곤은 가까운 관계였다). 체사레가 어떤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벌인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알폰소는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로마에서 도주했다. 교황은 딸의 안전을 위해 루크레치아를 소도시 스폴레토로 보냈고, 도망갔던 남편도 이곳으로 찾아와 두 사람이 다시 함께 살았다. 부부는 이곳에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자신의 정치적 계획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누가 되었든 가차 없이 처치해 버리는 체사레가 있는 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1500년 7월 15일, 자객 5명이 길거리에서 알폰소를 공격했다. 루크레치아는 중상을 입은 남편을 간호하면서, 혹시 오빠가 또 공격해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방 앞에 호위병 16명을 배치했다. 그러나 체사레 앞에서는 이런 정도는 무용지물이다. 마치 마피아 영화에서 그러하듯, 사흘 뒤 알폰소는 어느 틈엔가 누군가에게 목 졸려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겨우 20세에 루크레치아는 큰오빠, 애인, 남편이 모두 작은오빠 체사레에게 살해당하는 꼴을 당했다. 그러자 세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체사레가 여동생과 근친상간 관계여서 주변 남자들을 질투한 나머지 모두 죽였다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 오페라는 그런 식의 흑색 전설을 따르는 경향이 있으나, 그보다는 체사레의 정치적 욕망이 주요 동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가문은 루크레치아의 세 번째 결혼을 주선했다. 상대는 장래 페라라 공작이 되는 에스테의 알폰소였다. 루크레치아로서는 어떻게든 로마의 친정집 식구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흑색 전설에 따르면 당시 떠들썩한 연회에 매춘부 50명이 초대되어 손님들 모두 질펀하게 놀았다고 한다. 1502년 1월, 마침내 루크레치아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도시 페라라로 떠났다.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로마의 악덕에서 벗어난 그녀는 마침내 행복한 삶을 되찾았다. 두 사람 사랑의 결실로 아이도 여럿 낳았다.

    왕위 계승과 교황가문 얽히고설켜

    1503년 교황 알렉산데르가 사망했고, 체사레 역시 1507년 전투에서 사망했다. 루크레치아는 아마도 슬픔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후 그녀는 여인으로, 어머니로 그리고 예술 후원자로 평온한 삶을 살다가 1519년 39세에 11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후대의 문학 작품과 영화, 드라마는 루크레치아를 타락한 모략가, 살인을 행하는 요부, 근친상간녀 등 악마적 캐릭터로 각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잔혹한 운명의 희생자에 가깝다.

    르네상스 시대의 찬란한 예술 작품들을 보노라면 이런 문화를 탄생시킨 당대 사회가 매우 덕성스러운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치와 문화가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지는 않는 듯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서 잔인하지만 유능한 체사레의 리더십 찬양]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매우 훌륭한 통치 행위를 수행한 인물로 제시한 바 있다.

    "로마냐 지방을 점령한 공작(체사레)은 그 지역이 예전부터 무질서가 판치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곳을 평정하기 위해 라미로 도르코(Ramiro d'Orco, 혹은 Ramiro de Lorca)라는 잔인하지만 유능한 인물을 파견하면서 전권을 위임했다. 그는 단기간에 질서와 평화를 회복했으며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시민들의 반감이 높아졌다는 것을 눈치챈 공작은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했다. 이제껏 행해진 잔인한 조치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 대리인인 라미로의 난폭한 성격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어느 날 아침 공작은 두 토막이 난 라미로의 시체와 형구들, 피 묻은 칼을 광장에 전시했다. 참혹한 광경을 본 시민들은 한편으로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고자 :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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