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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쾰른과 쾰른 대성당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

    발행일 : 2022.08.24 / 특집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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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 박사(예수 탄생 때 찾아왔다고 전해진 3명) 유골 있다는 성당… 2차대전 때 14회 공습받아

    유럽이 에너지 대란을 겪고 있대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연합(EU)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했는데, 러시아 측도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수출량을 대폭 줄인 탓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는 "쾰른 대성당이 더 이상 밤에 조명을 켜지 않는다"고 지난 16일(현지 시각) 보도했는데요. 에너지 절약을 위해 밤 11시가 되면 쾰른 대성당을 포함한 130개 이상의 공공 건물에서 야간 조명을 끈다는 거예요.

    쾰른은 아름다운 야경으로 유명한 도시예요. 쾰른 대성당은 하루 평균 2만여 명이 방문할 정도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고요. 이 성당은 약 280년의 공사 중단 기간을 포함해 1248년부터 1880년까지 600여 년에 걸쳐 지어졌어요. 쾰른과 쾰른 대성당에 대해 알아볼게요.

    중세 시대 독일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

    쾰른은 독일 서부 라인강에 걸쳐 있어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기원전 58년~기원전 51년)을 통해 갈리아 지방을 영토로 편입하면서 로마 제국의 국경 안으로 들어왔지요. '쾰른(K ln)'이라는 도시명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를 의미하던 말인 '콜로니아(Colonia)'에서 유래했어요.

    중세 시대인 10세기부터 쾰른은 독일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어요. 라인강을 끼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지요. 직물 공업, 가죽 공예와 금속 세공이 특히 발달했어요. 이 시기 쾰른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지만, 쾰른 대주교의 통치를 받고 있었어요.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성직자도 영지를 소유하며 세속 군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거든요.

    도시가 경제적으로 번영하자 시민들은 더 자유로운 무역을 위해 통치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어요. 이에 13세기 무력 투쟁으로 대주교를 몰아내고, 자치권을 획득해 자유도시가 되지요. 이후 쾰른 대주교는 쾰른에서의 정치적인 권력을 포기하고 영적인 지도자로 남게 됩니다.

    쾰른의 시민들은 시의회와 법을 만들어 도시를 운영했고 상공업은 더욱 발달했어요. 당시 북해·발트해 연안의 상업 도시들은 해상무역의 안전과 상권 확장을 위해 한자동맹을 맺었는데요. 14세기 한자동맹의 전성기에는 거의 100여 도시가 가입했을 정도로 세력이 컸어요. 쾰른은 한자동맹 안에서도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답니다.

    예술과 학문도 번창했습니다. 1388년 설립된 쾰른 대학은 오늘날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학 중 하나예요. 중세 스콜라 철학의 대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년 추정~1274)도 이곳에서 공부했대요. 현대 인물 중 쾰른 대학 출신의 저명한 학자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하인리히 뵐(1917~1985)과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쿠르트 알더(1902~1958) 등이 있답니다.

    연합군에게 262회 공습받아

    1793년 프랑스혁명 중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유럽의 절대왕정 국가들은 위기감을 느꼈어요. 이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등이 대(對)프랑스 동맹군을 결성하고 전쟁을 통해 프랑스를 혁명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합니다. 하지만 전세는 프랑스 쪽으로 기울고, 1794년 프랑스혁명군이 쾰른을 점령했어요. 쾰른의 시의회는 해산되고 프랑스 민법이 도입됐죠.

    프랑스는 쾰른의 수녀원·수도원 및 대학을 폐지하고 교회의 재산을 공공 소유로 전환했어요. 쾰른의 자유도시 역사가 끝난 것이지요. 이후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되면서 프랑스군은 도시를 떠났고, 쾰른은 오늘날의 독일인 프로이센에 편입됩니다.

    쾰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큰 수난을 겪는데요. 연합군이 262회에 걸쳐 공습을 했습니다. 2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도시는 완전히 황폐화됐어요. 전쟁이 끝난 후 쾰른은 재건됐고, 독일 북서부의 경제와 문화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독일에서 넷째로 큰 도시이지요.

    동방박사 유골 보관하려 만들어

    쾰른 대성당은 157m 높이로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독일의 울름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셋째로 높은 성당이에요. 쾰른 대성당은 신성한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는데요.

    쾰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116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밀라노에서 전리품으로 동방 박사 세 사람의 유골이라고 전해지는 유골을 가져왔어요. 동방 박사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동쪽에서 온 이방 출신 현인(賢人)으로 전해져요. 이 유골은 대주교가 통치하는 쾰른으로 넘겨졌고, 1248년 쾰른 대주교는 유골 보관을 위해 쾰른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지요. 덕분에 쾰른 대성당은 유럽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순례지 중 한 곳이 됐답니다.

    쾰른 대성당은 자금 부족으로 16세기부터 약 300년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어요. 이후 쾰른이 프로이센으로 편입된 19세기 들어 사람들은 다시 중세의 역사와 고딕양식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주도로 재건이 추진됩니다. 쾰른 시민들은 대성당 공사를 위해 기부금을 냈고, 정부도 일부 비용을 지원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1880년 쾰른 대성당이 완공됩니다. 완공 당시 이곳은 미국의 워싱턴 기념탑이 완공된 1884년까지 4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쾰른 대성당도 14번이나 공습을 받았어요. 쾰른 대성당의 쌍둥이 첨탑은 눈에 잘 띄어서 표적물로 삼기 쉬웠거든요. 이때 파손된 부분은 1956년 복원이 완료됐어요. 쾰른 대성당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는데요. 동방 박사의 유해를 담고 있다고 전해지는 성당 안의 황금색 유골함은 중세 황금 세공 기술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답니다.

    [군인 조롱하며 시작된 로테풍켄]

    중세 시대 쾰른은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군대를 갖고 있었어요. 쾰른의 도시 군인들은 붉은색 재킷과 흰색 바지를 제복으로 착용했지요. 그런데 18세기에는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져 군인들이 할 일이 없었다고 해요. 이에 생계 유지가 어려워진 군인들은 뜨개질을 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며 돈을 벌었지요. 쾰른 시민들은 동네 허드렛일을 하는 도시 군인들을 조롱하기 일쑤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1794년 프랑스혁명군이 도시에 들이닥쳤을 때 쾰른의 군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이에 1823년 쾰른 시민들은 무력했던 쾰른의 군대를 조롱하기 위해 '로테풍켄(Rote Fun ken·붉은빛)'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는데요. 붉은 제복을 입은 단체의 회원들은 축제 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행진했어요. 도시 군인들을 희화화한 축제로 시작됐지만, 오늘날에는 도시를 거닐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선사업을 하는 단체로 자리 잡았답니다.
    기고자 :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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