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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고려극장의 세계유산 계획, 한국이 지원하자

    어수웅 문화부장

    발행일 : 2022.08.23 / 여론/독자 A3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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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용도로 우산이 필요할지는 미처 몰랐다. 카자흐스탄 출장이었는데, 주최 측은 우산 필참이라고 했다. 중앙아시아 나라들은 강수량 적기로 이름난 메마른 땅. 소나기라도 가끔 내리는건가? 아니었다.

    출장의 목적은 고려인 출신 독립영웅을 기리기 위한 우슈토베 추모의 벽 제막식. 1937년 러시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7만명은 소련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2만명 가까운 이들이 추위와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고려인들이 그해 6개월 동안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 85년이 흘렀지만, 그 땅은 여전히 허허벌판이었다. 간이 화장실 하나가 없었다. 우산은 그래서 필요하다고 했다. 혹시라도 용변이 급할 경우, 활짝 펴서 부끄러움을 덮으라는 것이다.

    이번 출장에서 많은 고려인을 만났다. 재미동포, 재일동포, 재중동포는 종종 볼 기회가 있었지만, 고려인 동포는 처음이었다. 추모의 벽 행사 이후 찾은 곳이 옛 수도 알마티 시의 고려극장이다. 1층에 익숙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다. 지난해 유해가 봉환된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1943) 장군. 역시 1937년에 강제 이주됐던 그는 말년에 고려극장 경비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만큼 동포들의 구심점이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극장의 이름은 '고려'인데, 카자흐스탄 '국립'이라는 것. 여기에는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고려극장의 시작은 193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외 한인공동체 중 가장 오래됐지만, 극장 유전(流轉)이 눈물겹다.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와 함께 이역만리(異域萬里)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에도 소비에트가 지시할 때마다 이 도시 저 도시 옮겨 다녔다. 소수민족 관리와 화합이라는 기치(旗幟) 아래 소련과 카자흐스탄은 극장에 '국립'의 지위를 부여했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리얼리즘 공연이 대종이었지만, 그때도 커튼 뒤에서는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카자흐스탄 10만 고려인의 눈물을 닦았다. 지금 고려극장은 멀리는 안톤 체호프부터 가깝게는 우리 사물놀이까지, 인류의 보편적 고전과 우리 민족예술을 아우른다. 극장의 핵심 관계자 중 한 명인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 김 게르만 교수를 만났다. 고려인협회 부회장을 지낸 그는 '카자흐스탄 공훈학자' 칭호를 부여받은 저명한 역사학자. 그는 고려극장의 희망을 넌지시 털어놨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어떤 세계적 기관이 그 가치를 알아봐주고 지정해주는 제도가 아니다. 지키고 누릴 만한 가치가 있어 스스로 인정했으니, 앞으로 세계인과 나누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등재를 꿈꾸는 나라 스스로 자국의 잠정 목록에 올린 뒤 서류 작업을 준비한다. 물론 엄격하다. '인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구체적 세부 기준이 있고, 이 기준에 맞춰 두툼한 벽돌책 분량의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김 게르만 교수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했다. 카자흐스탄과 달리 한국은 수많은 성공 사례가 있으니, 서류 작성 매뉴얼 등 노하우를 전수받고 싶다는 것이다.

    최초의 원형 극장도 아닌 데다 경험도 없으니 물론 쉽지 않은 도전이다. 게다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한국이 아닌 카자흐스탄의 세계유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의 꿈을 한국이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세운 비전 중 하나가 '글로벌 중추 국가'다. 새 정부는 자유와 인권 그리고 번영이라는 가치를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로 넓히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거둔 국가 발전의 자부심과 책임감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잘 모르는 남도 돕는데 하물며 세계에 퍼져 있는 한국인 디아스포라다. 왜 안 되겠는가.

    최근 한국계 세계시민들이 만들어내는 한국 문화의 확장은 눈부시다. 재일교포 4대의 서사인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필두로, 한국인 엄마와 한식의 추억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른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 등을 보라. 이민진이 말한 것처럼 세계인들은 톨스토이를 읽을 때는 러시아인이 되고, 디킨스를 읽을 때면 영국인이 되며, '파친코'를 읽을 때는 한국인이 되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국립 고려극장의 국적은 카자흐스탄이지만, 세계유산 고려극장의 관객은 결국 한국 문화를 경험하게 되는 법. 대한민국은 그렇게 또 한 뼘 확장될 것이다.
    기고자 : 어수웅 문화부장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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