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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키보드에 빠진 사람들

    김미리 기자

    발행일 : 2022.08.23 / 문화 A1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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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각딸각… 도각도각… '현대인의 연필' 키보드

    직장인 박재연(32)씨에겐 자기만의 힐링 방식이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멍 때리며 애국가 1절을 반복해 입력한다. 애국가 마니아는 아니다. "타이핑할 때 느껴지는 키보드 촉감,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한다. 지금 가진 키보드는 여덟 대. "한 글자 치는 데 1원이라고 생각해도 종일 컴퓨터로 일하는 사무직에겐 가성비 좋은 취미죠. 따분한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한 '소확행'이라 생각해요."

    컴퓨터의 일부로 여겨지던 키보드의 지위가 최근 몰라보게 높아졌다. 글자 입력 도구를 넘어 그 자체가 취미 대상이다. 문구 덕후처럼 여러 종류 키보드를 쓰고, 오디오·자동차 마니아처럼 맞춤식으로 제작하기도 한다.

    글 쓰는 일러스트 작가 밥장(본명 장석원)씨는 1년 전 쓰러졌다가 건강을 회복한 뒤 키보드에 빠졌다. 심기일전하며 장비를 갖춘다는 생각에 키보드를 장만하려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무궁무진한 세계를 발견했다. "예전엔 더도 덜도 아닌 '자판' 개념이었는데 이젠 키보드가 개별 매체가 됐어요. LED, 복고풍 등 취향 따라 엄청나게 세분화돼 있어요. 필기구 마니아에게 연필이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라 연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처럼요." 그는 외출할 때 옷 고르듯 키보드 여섯 대를 그날 기분이나 날씨에 따라 바꿔 쓴다. "손끝 감각을 일깨우며 일상의 잔재미를 살려주는 아이템"이라고 했다.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살아 있는 육체성의 느낌이 나에게는 소중하다." 하루 너덧 시간 '연필 노동'을 한다는 소설가 김훈이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 쓴 연필 예찬이다. 요즘 세대에겐 키보드가 그런 존재다. 밥장은 키보드를 '현대인의 연필'에 비유했다.

    김훈이 말한 연필의 육체성이 '옆으로 밀고 나가는 느낌'이라면 키보드의 그것은 '아래로 누르는 느낌'이다. 마니아들은 타건(打鍵)감, 키감(키보드 누를 때 드는 느낌)을 중요한 선택 기준으로 삼는다. 방식에 따라 청축, 갈축, 적축, 무접점 등으로 나누고 압력과 소리를 비교한 뒤 기호 따라 고른다. 디지털의 산물인 키보드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즐기는 셈이다. 용산 전자상가 등에선 키보드를 직접 쳐보고 소리를 비교할 수 있는 '타건숍'까지 있다. 직장인 이모(33)씨는 "학창 시절 필기할 때 연필 진하기, 샤프심 굵기에 예민한 편이었는데 그런 성향이 키보드로 옮아갔다"고 했다. 이씨는 고가 브랜드 중 하나인 '레오폴드'의 16만원대 '저소음 적축' 키보드를 쓴다.

    어른의 장난감이 되면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제품도 등장했다. 박재연씨는 "1만~2만원대부터 '키보드계의 에르메스'라고 불리는 커스텀(맞춤식) 키보드 '키컬트(Keycult)'는 수백만원까지 한다"며 "일부 나이키 운동화의 리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촉각과 청각은 등을 맞대고 있다. 'Vito ASMR' 등 유튜버들이 키보드 소리로 만든 몇 시간짜리 'ASMR'을 업무 집중용이나 수면용으로 쓰는 이들도 많다. '사각사각'이 연필의 의성어라면 키보드 덕후 사이엔 '딸각딸각' '보글보글' '도각도각' 같은 의성어가 통용된다. 연예인 데프콘은 유튜브 채널에 여러 키보드를 비교하며 '백설기 같은 쫀득쫀득한 느낌' 등으로 설명한다.

    MZ 세대 심리가 궁금해 키보드를 교체했다는 X 세대 방송작가 이모(43)씨는 "키보드는 감각의 연장을 보여주는 도구"라며 "감촉이나 소리에 민감해진 요즘 세대의 특성을 보여주는 현상 같다"고 분석했다.
    기고자 : 김미리 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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