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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 드레스룸에 크고 무거운 미닫이문이 달려 있었다. 드레스룸이라고 해봐야 반 평도 안 되는 공간이고 이어지는 욕실에 또 문이 있으므로 그 미닫이문은 공간만 차지하고 별 쓸모가 없었다. 어느 날 그 문을 떼어 내다 버렸다. 너무 크고 육중해서 같은 동네에 사는 후배를 불러 함께 옮겨야 했다. 대형 폐기물 처리 비용은 생각보다 적었으나 후배와 마신 술값은 그렇지 않았다.

문을 떼어내자 속이 시원했다. 다만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릴 때 좀 민망했다. 이미 모든 것을 본 사이이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봤기 때문에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파트 드레스룸이란 게 대개 욕실에서 나와 몸을 정리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그곳에 문이 없다고 해서 욕실 안 좁은 공간에서 깨금발로 몸을 닦는 건 무척 불편했다.

문 대신 커튼이랄까 가리개 같은 것을 달기로 했다. 찾아보니 그런 기성품이 꽤 나와 있었다. 그런데 크기가 너무 작거나 컸다. 적당할 것 같으면 요란한 무늬가 있거나 '행복한 나날들'이나 '즐거운 우리집'처럼 영혼 없는 영어 문구가 인쇄돼 있었다. 2차대전 당시 영국의 대국민 캠페인 '침착하게 하던 일을 하라'가 새겨진 커튼도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 다짐해 볼 만한 문구는 아니었다. 커튼집에 가도 내가 원하는 크기와 모양의 커튼은 없을 것 같았다.

광장시장에 가면 재봉틀 한 대로 천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만들고 고치는 1인 가게들이 여럿 있다. 아주머니는 어디에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왜 거기에 커튼을 다느냐며 꼬치꼬치 물었다. 마치 의사가 처방 전에 문진을 하는 것 같았다. 진찰이, 아니 상황 판단이 끝난 아주머니는 "깃발집에 가서 광목 두 마 반을 사오라"고 했다. 가게 이름이 깃발집인 건 아니고 가보면 안다고 했다. 가르쳐 준 대로 가니 간판 대신 연두색 깃발이 꽂혀있는 원단 가게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큰 광목천을 내가 원하는 사이즈에 맞춰 줄자로 재더니 죽죽 찢었다. 익숙한 솜씨로 빙빙 돌리며 재봉틀 마감을 한 뒤 종이 쪽지에 약도와 전화번호를 적어 내밀었다. '펀칭집'으로 불리는 그곳은 근처 먹자골목에 있었다. 천에 구멍을 뚫고 쇠 장식으로 마감해 커튼을 봉에 끼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각종 크기와 색깔의 원형 쇠붙이들이 선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머릿속에 그려뒀던 한 폭짜리 광목 커튼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저 시장이란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탔을 뿐이었다. 살림의 모든 해답은 시장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쳤다. 기고자 : 한현우 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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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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