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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쿠팡의 '가위손'이 드라마에서 잘라낸 것

    이태훈 문화부 차장

    발행일 : 2022.08.19 / 여론/독자 A3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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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중국의 명장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는 상영 시간이 171분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미국 배급권을 사들인 할리우드 실력자 하비 와인스타인은 영화가 길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개봉판에선 14분을 잘라냈다. 그해 칸 심사위원장이었던 프랑스 감독 루이 말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그 영화가 아니다"라며 분노했다. 와인스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어딜 잘라냈는지 한번 말해보라고 해." 나중에 전해진 그의 대답이었다.

    영화는 극장에만 걸리는 게 당연하던 시절, 투자 배급사의 힘은 지금보다 더 막강했다. 특히 세계 최대 시장 미국으로 가는 길목을 틀어쥔 와인스타인은 '갑 중의 갑'이었다.

    그 시절 와인스타인은 '가위손 하비(Harvey Scissorhands)'로 불렸다. 그는 감독이 재편집을 거부하면 개봉을 몇 년이고 미뤘다가 바로 비디오로 출시해버렸다. 미국 독립영화의 전설 짐 자무시부터 이란의 거장 아바스 키아로스타미까지, 그의 '갑질'에 당한 감독의 목록은 길고 묵직하다.

    하지만 서슬 퍼랬던 와인스타인도 가위질 전에 의견은 주고받았다. '설국열차'(2013) 미국 개봉 때, 그가 봉준호 감독에게 영화를 줄이라고 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전체 126분 중 물고기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포함해 25분 분량을 콕 집었다. 봉 감독은 순간적으로 "어부였던 아버지에게 바치는 장면"이라고 둘러댔다. 우여곡절이 더 있었으나, 감독의 기지 덕에 '설국열차'는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사실 봉 감독의 아버지는 그래픽 디자이너였지만.

    이달 초 드라마 '안나'의 이주영 감독이 "쿠팡플레이가 8부작을 일방적으로 6부작으로 편집해 작품을 훼손했다"고 주장하며 시작된 논란이 뜨겁다. 쿠팡이 8부작 '감독판'을 공개한 뒤엔 '어느 쪽이 더 재밌냐'는 식의 설왕설래도 분분하다. 분신과 같은 창작물이 이리저리 잘린 채 세상에 공개되는 걸 지켜본 창작자에게 '팔다리가 없으니 잘 굴러가서 더 예쁘더라'고 말할 수 있나.

    이주영 감독은 2017년부터 5년여 이 드라마를 준비했다. 영화감독 데뷔 전엔 삼성 갤럭시 핸드폰이나 쌍용 티볼리 자동차 등의 CF를 찍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남의 돈으로 영상 찍는 작업을 오래 해왔다. 광고주, 투자사의 말을 무시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일만 했다"고 했다.

    영화로 치면 투자와 배급을 겸하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는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갑'이다. 당연히 창작자는 최대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지키려 하고, 투자자는 가능한 한 '돈'이 되도록 바꾸려 한다. 시청자와 만나는 작품은 서로 설득하고 합의점을 찾아낸 노력의 결과물이어야 했다. 드러난 논란과 공방만으로도, 쿠팡플레이의 설득과 합의 노력이 충분했느냐는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쿠팡플레이는 지난 7월 월간 활성 이용자수(MAU·모바일인덱스 집계)가 481만명으로 한 달 만에 110만명 늘어 토종 OTT 선두가 됐다고 한다. 손흥민이 뛰는 영국 프로축구 경기 중계와 드라마 '안나'가 1등 공신이었다. 논란 속에 공개된 8부작 '안나 감독판'은 지금도 더 큰 수익을 벌어다 주고 있을 것이다.

    굳이 '저작 인격권' 같은 개념을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작품 한 편은 거기에 투입한 창작자들의 세월과 땀과 눈물, 인격의 총합이다. 감독과 스태프들은 소송하겠다지만, 이긴다 해도 이들이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투자자에게 맞선 싸움이 어떤 불이익으로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싸우겠다고 한다. 쿠팡의 가위손이 잘라낸 것은 단순히 드라마의 분량이나 작품의 서사적 개연성이 아니라, 창작자들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기고자 : 이태훈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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