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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가 작곡이라면 시공은 교향악 연주"

    김미리 기자

    발행일 : 2022.08.17 / 문화 A2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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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물 뒤 '보이지 않는 손' 정세학 장학건설 대표

    제아무리 훌륭한 설계도 실제 건물을 짓는 과정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설계 도면 속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건물을 짓는 과정, 즉 시공(施工)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건축 작품을 만들어낸 주인공으로 건축가는 조명받지만, 공사 현장의 사람들은 간과되는 게 현실이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건축가는 작곡가, 시공사는 여러 악기 연주자가 모인 교향악단이다. 창호, 목공, 금속 작업 등을 하는 팀이 각각의 악기를 연주하는 셈이다. 시공사 대표는 악단장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서울 한남동 사무실에서 만난 장학건설 정세학(67·작은 사진) 대표는 건축 과정을 이렇게 비유했다. 장학건설은 28년 된 국내 정상 시공 회사 중 하나다.

    최근 건축계 최대 화제작인 서울 도산대로의 송은문화재단 사옥과 경기도 화성의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이 이들의 손을 거쳐 구현됐다. 송은문화재단은 건축가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은 마리오 보타(총괄건축가 한만원)가 설계했다. 이들 세계적 건축가의 설계안을 바탕으로 노출 콘크리트를 만들고, 벽돌을 쌓아 건물 공사를 한 회사의 수장이 정 대표다.

    그는 "두 프로젝트를 통해 거장이라 불리는 해외 건축가의 이름값을 실감했다. 디테일 하나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며 "국내 건축계와는 비교 안 될 정도로 샘플링과 목업(mock-up·모형 제작) 작업에 집요하게 매달리더라"고 했다. 예컨대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은 송은 사옥을 설계하면서 경기도 용인에 2층짜리로 15평 규모 모형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노출 콘크리트 외벽, 유리문, 방화문까지 달아 실제 건물에 적용됐을 때를 테스트했다. 마리오 보타는 장학건설을 통해 벽돌 샘플 50여 종을 만들고 여러 방식으로 쌓기 실험을 하게 했다. 그 결과 다섯 가지 벽돌을 추출했고, 총 70만장을 만들어 이 가운데 53만3000장을 쌓아 건물을 지었다. 정 대표는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은 매주 서너 차례 화상 연결을 하면서 하나씩 디테일을 챙겼다. 마리오 보타는 벽돌 몇 장이 잘못 얹힌 걸 보고 현장에서 헬멧을 던질 정도로 완벽주의에 장인 정신이 투철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대기업 오너들의 고급 주택 건축·인테리어 시공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현장에서 보면 최근 한국 건축가와 건축주 수준이 확실히 높아졌지만 문화 사대주의는 여전히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맡은 프로젝트의 설계자가 네댓 번 바뀌어 해외 건축가에게 간 적도 있다. "설계가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서 건축주가 국내 건축가에겐 불평하면서 해외 건축가에겐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문화는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 대표는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건축 이론과 건설 경영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직접 발탁해 1987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1994년 독립, 장학건설을 설립했다. "처음엔 그 좋은 학벌 두고 왜 '막노동' 회사를 차렸느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유학하면서 좋은 건축물이 있으려면 시공의 디테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오기로 한우물 팠다"고 했다.

    그에게 건축과 건설에 대한 막연한 꿈을 불어넣은 사람은 외삼촌인 시인 김광균이었다. "어린 시절 서울 경운동에 외삼촌 댁 한옥이 크게 있었다. 그곳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집의 공간감을 익힌 것 같다." 김광균은 시인이면서 벽지 무역 등을 하는 사업가였다. "외삼촌 회사 이름이 '건설실업'이었다. 건설업을 한 게 아닌데 '건설적인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건설'을 붙이신 듯하다. 그래서 내가 건설 일을 할 운명이 됐나 싶기도 하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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