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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최치원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발행일 : 2022.08.11 / 특집 A26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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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당나라)이 시기한 글재주 가졌지만 신분제에 가로막혔죠

    여름을 맞아 부산 해운대에 피서객이 몰리고 있대요. 그런데 '해운대(海雲臺)'라는 이름이 신라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인 최치원(崔致遠)과 인연이 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최치원은 '외로운 구름'이라는 뜻의 '고운(孤雲)'을 호(號·본명 이외에 쓰는 이름)로 사용했지만, '해운(海雲)' 또한 함께 사용했어요. 바로 이 '해운'에서 해운대라는 명칭이 유래했고, 지금도 해운대와 연결된 동백섬 안쪽 작은 바위에는 최치원 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 글씨가 남아 있어요. 최치원 선생의 삶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중국 당나라 유학과 과거 합격

    최치원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857년 태어났어요.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은 하급 귀족인 6두품 출신으로 숭복사(崇福寺)라는 절을 건립할 때 참여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그 조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어요.

    868년 최치원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어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최견일은 "10년 안에 진사(과거 시험을 의미)에 급제하지 못한다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해요.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제 사회에서 6두품 신분에 속하는 그의 집안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나라에서라도 과거 급제를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중국 당나라에서는 9세기 들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를 개설했어요. 신라의 많은 젊은이도 여기에 도전하게 됐고, 신라의 경문왕(재위 861~875년)이나 헌강왕(재위 875~886년)은 빈공과 출신자들을 우대하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러 기구를 만들거나 벼슬을 내려줬어요. 골품이 높아야 관리가 될 수 있었던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 유교 이념이나 문장 실력이 뛰어나고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된 거예요.

    최치원 역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다른 사람이 100번을 하면 자신은 1000번을 하는 자세"로 노력했다고 해요. 마침내 874년, 당나라에서 유학한 지 6년 만인 18세에 과거 시험에 급제했어요. 그것도 경쟁 상대였던 발해 출신을 제치고 수석 합격의 영예를 고국 신라에 안겨주었답니다.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키다

    최치원이 글 또는 문장으로 문명(文名·글을 잘 써 드러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881년 '격황소서(檄黃巢書·일명 토황소격문)'를 작성하면서부터예요. 당나라 말기 중국에서는 환관의 횡포와 농민에 대한 수탈이 원인이 된 '황소의 난'이 일어났는데요. 주동자는 지방 토착 세력인 호족 출신 황소(黃巢)였어요.

    그때 최치원이 모시던 고변(高騈)이라는 인물이 임시 특별 부대의 정부 지휘관으로 황소 무리를 토벌하게 됐어요. 격황소서란 이들에게 항복을 권하기 위해 보내는 격문(檄文·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으로, 최치원이 고변 대신 글을 쓰게 된 건데요. "당나라 조정은 바르고 강성하지만 황소 무리는 비뚤어지고 무모하니 사태를 올바로 직시해 항복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었어요. 그중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 놓고 죽이려 생각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조차도 이미 너를 은밀히 죽일 의논을 마쳤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보고 황소가 깜짝 놀라 평상에서 떨어졌다는 일화도 전해져요.

    이 일을 계기로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해요. 그 결과 중국 당나라의 역사서인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저명한 서적 목록을 수록한 책)에도 그의 책 이름이 남게 됐어요. 고려시대 이규보는 당서 예문지에만 최치원의 글이 수록되고, 인물의 전기를 기록한 열전(列傳)에 그의 전기가 수록되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질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어요.

    불우한 정치가로서의 삶

    885년 29세의 나이에 최치원은 신라로 귀국했어요. 당시 헌강왕은 그에게 왕실과 관련된 글을 짓고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중요한 벼슬을 내렸어요. 최치원 역시 당나라에서 배운 경험과 식견을 바탕으로 신라의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고 싶었죠. 귀국 직후 헌강왕에게 바친 '계원필경(桂苑筆耕)'은 그의 학문적 깊이와 실천 역량에 대한 증거였어요. 계원필경은 중국 유학 중 최치원이 창작한 1만여 작품 중 일부를 선별해 20권으로 편집한 책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이에요.

    그러나 최치원의 기대와 의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어요. 886년 그를 발탁한 헌강왕이 갑자기 죽게 되는데요. 신라 조정의 보수적인 귀족 세력과 관료 집단은 6두품 출신인 그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최치원은 그 뒤 오늘날 전북 태인과 충남 서산의 태수(지방관)로 부임했는데 그곳에서도 비명(碑銘·비석에 새긴 글)이나 불사(佛事·불가에서 행하는 모든 일)와 관련된 글을 짓고, 또 진성여왕(재위 887~897년)이 요구하는 각종 문건을 쉼 없이 작성해야 했어요. 신라 왕실은 최치원의 필력을 인정했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는 전혀 해주지 않았어요.

    894년 최치원은 상소문인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했어요. 10여 년 동안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진골 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란 등 혼란한 사회의 모습을 목격하고 이를 바꾸고자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거예요. 시무책을 본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렸어요. 하지만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되지 않았어요. 당시의 사회 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 귀족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 없었던 거지요.

    신라 왕실에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최치원은 40여 세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은거(隱居)를 결심하게 돼요. 최치원이 즐겨 찾은 곳은 지리산 쌍계사를 비롯해 부산 해운대도 있었어요. 말년에는 친형이 승려로 있던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무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최치원이 활동하던 시대는 통일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고 당나라가 멸망하는 종말의 시대이자 대전환의 시기였어요. 그는 자기의 뜻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시대와 출신의 불우함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좌절한 정치인이자 불굴의 대문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답니다.

    [최치원의 삶이 배어 있는 한시]

    "가을 바람에 애써 읊조리건만(秋風唯苦吟), 세상에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世路少知音), 깊은 밤 창 밖에 비 내리는데(窓外三更雨), 등불 앞 마음은 머나먼 고향으로(燈前萬里心)."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는 최치원의 이 한시는 그의 일생을 가장 잘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돼요. 그는 난세를 만나 부단히 노력했지만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는커녕, 갈수록 불우한 상황에 처했지요. 문장가이자 유학을 공부하는 관료로서의 모습을 가졌던 최치원은 '선비(士)'의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준답니다.
    기고자 :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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