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무력시위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

    발행일 : 2022.08.10 / 특집 A27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전쟁은 최후의 외교"… 中이 대만 주변에 미사일 쏜 이유

    중국군(軍)이 지난 4일 대만 주변 해역을 포위하는 군사훈련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대만 주변 해역에 미사일 등을 발사했는데, 일부 미사일은 수도 타이베이 상공을 통과했대요. 이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지난 2~3일 대만을 방문한 것에 대한 보복성 '무력시위'였어요. 이에 대만도 대규모 포사격(砲射擊) 훈련을 예고하면서 대만과 중국 사이에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데요.

    무력시위란 군사상의 힘을 드러내 상대방을 위협하는 것을 말해요. "전쟁은 최후의 외교"라는 말이 있는데요. 무력시위는 전쟁 전 상대 국가가 힘의 차이를 느끼게 만들어 한발 물러서게 하려는 외교 작전으로, 경고의 의미가 있어요. 중국과 미국·대만이 대립하고 있는 이유와 역사 속의 무력시위 사례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상하이 공동성명과 대만 관계법

    중국은 미국이 올해 들어 지난 7월까지 총 4번이나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를 승인한 것에 불만을 표해 왔어요. 미국과 중국, 대만의 삼각관계는 1949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중국 본토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건국을 선언한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국민당은 중앙정부와 주요 기구를 대만으로 옮기고 중화민국을 세웠어요. 이것이 지금의 대만입니다.

    처음에 미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했습니다. 대만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60년대까지 유엔(UN) 상임이사국 지위를 차지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런 외교 정책은 1970년대부터 바뀌기 시작했어요.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국제질서가 미국과 소련의 양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러면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 노력하기 시작해요. 미국과 중국의 본격적인 교류는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시작됐어요.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상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됐지요.

    문제는 당시 중국과 대만 모두가 중국은 하나이고, 두 국가 모두 자국이 '중국의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중국은 대만을 중국의 영토로 보면서 미국과 대만의 외교 단절을 바랐어요.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바랐던 미국은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1979년 대만과의 군사동맹인 공동방위조약을 폐지했고, 그렇게 대만과 미국의 공식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미국 내부에서는 대만과의 외교 단절에 반발하는 여론이 만들어졌고, 같은 해 미국 의회는 대만과 문화·통상 등에서의 비공식 외교 관계를 이어간다는 내용의 '대만 관계법'을 통과시켰어요. 이 상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대만 관계법이 만들어질 때부터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 법에는 대만뿐 아니라 중국 본토를 포함한 서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보 등을 유지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거든요. 중국은 자국과 대만의 관계에 제3자인 미국이 간섭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에요.

    하지만 미국은 지금까지도 중국과의 공동 성명을 근거로 대만에 대한 지원을 정당화하고 있어요. 미국과 중국은 상하이 공동 성명을 포함해 총 3차례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는데, 미국은 성명에서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며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것에는 반대 입장을 드러냈어요. 즉,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도발은 평화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은 자국이 대만을 지원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거예요.

    대만 총통의 미국 방문으로 위기 촉발

    대만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충돌은 여러 번 있었어요. 대만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재임 시절 실용 외교 정책을 펼치며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그 결과 미국은 1992년 대만에 전투기 150대 판매를 승인하기도 했어요. 이런 상황을 중국이 반길 리 없겠지요.

    1995년 6월 리덩후이 총통은 모교인 미국 코넬대에서 '대만의 민주화 경험'을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미 정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요. 당시 중국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은 국가의 국민에게 비자 발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어요. 하지만 미국 의회는 리 총통의 미국 방문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실제 그는 코넬대에서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갔어요.

    그러자 중국은 이에 항의하면서 같은 해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8개월에 걸쳐 대만 앞바다에 미사일을 쏘며 긴장감을 조성했어요. 이에 미국은 2개의 항공모함 전단을 대만 인근에 집결시켰죠. 미국 군사력을 확인한 중국은 도발 행위를 중단했고, 그렇게 대만 해협 위기는 마무리가 됩니다.

    하지만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며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 정책을 고수하고 있어요. 대만에 전투기와 무기를 판매하며 중국의 대만 침략에 대비하면서도, "대만의 독립은 지지하지 않는다"며 중국과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 상황은 피하고 있는 것이지요.

    냉전 시대 쿠바 미사일 위기

    이런 무력시위는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렸던 냉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입니다. "전쟁의 문턱까지 갔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사건인데요. 당장에라도 미국과 소련이 전쟁에 돌입해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결국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죠.

    쿠바는 1959년 혁명으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 국가입니다. 1960년에는 당시 쿠바 총리였던 피델 카스트로(1926~2016)가 쿠바에 거주 중인 미국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어요. 이에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하고 대신 소련과 쿠바는 가까워진 상황이었지요.

    이 시기 미국은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해 소련을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었어요. 이에 소련은 1962년 10월 자국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이 공평한 경쟁이라고 생각했다는데요. 쿠바는 미국의 플로리다 반도의 끝에서 불과 23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요. 그래서 만약 미사일이 배치됐다면 미국을 위협하는 강한 무기가 될 수 있었지요.

    실제 소련은 40여 기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반입합니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자국민에게 미사일의 존재를 알리고 쿠바 주변에 해군을 배치해 해상을 봉쇄했어요. 그러면서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즉시 철거하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사용할 의지가 있다"고 합니다.

    세계인들은 핵전쟁이 일어날까 봐 초조해하며 소련의 대응을 기다렸어요.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에 집결하면서 양측의 대립은 악화일로를 걷는 듯했으나, 케네디와 당시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가 극적으로 타협하면서 이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소련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해요. 그리고 같은 달 쿠바에 있는 자국 미사일 기지와 터키에 있는 미국 미사일 기지를 서로 철수하자는 제안을 하지요. 미국은 이 제안을 수락했고, 그렇게 이 사건은 2주 만에 일단락되며 핵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기고자 :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3610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