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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천안문 망루'와 '펠로시 패싱'

    임민혁 정치부 차장

    발행일 : 2022.08.09 / 여론/독자 A3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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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초 박병석 국회의장이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수도 콜롬보 공항에는 현직 장관 4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자정이 다 된 늦은 시간에 영접하러 나온 것이다. 예우하겠다는 국가 차원의 의지가 있으면 이렇게도 한다.

    지난주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의 방한 때 '텅 빈 공항'이 논란이 되자 우리 외교부는 '입법부 외빈 의전은 국회가 담당하고, 행정부는 관련 없다'고 했다. 관료주의적 책임 회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의전 지침은 깨면 큰일 나는 절대 법칙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필요하다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펠로시가 대만·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외교부 장·차관들이 공항 영접을 나갔다. 이 나라들은 의전을 몰라 이랬겠는가.

    국회와 대통령실은 "미국 측이 공항 영접을 사양했다"며 사전 양해가 있었다고도 했다. 미 측이 한국에는 '안 나와도 된다'고 하고 일본·대만에는 '나와달라'고 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 우리만 안 나갔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선물 받는 쪽에서 '뭘 이런 걸 다…'라고 하니, 한국만 '그래? 그럼 안 줄게'라고 한 상황이 벌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펠로시를 만나지 않은 결정은 좀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은 최근 방한한 미국 싱크탱크 인사들을 만나려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대통령이 만나줄 '거물급'은 아니었다. 결국 일정이 안 맞아 성사는 안 됐지만, '도움만 된다면 급이 무슨 상관이냐'는 윤 대통령의 실용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윤 대통령은 취임 전에 차관보급인 성김 미 대북특사와 따로 식사하는 파격을 보인 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휴가'라지만 서울에 머문 윤 대통령이 미 대외 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펠로시를 '패싱'한 것은 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미 동맹 복원과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해온 윤 대통령이 펠로시를 만나는 건 튀는 행보가 아니었다. 펠로시가 방문한 유럽·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정상들을 만났기 때문에 부담도 적다. 해석이 분분한데 한 외교 소식통은 "바이든 대통령도 펠로시 대만 방문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소식이 들리니 대통령과 참모들이 최초 판단을 잘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속사정이 어쨌든 '휴가 때문'이라고 발표를 했으면 일관성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펠로시 방한을 전후한 대통령실의 뒤섞인 메시지는 '여론 안 좋으니 만나는 걸 고려했다가, 다시 그건 너무 모양새가 빠지니 통화 정도로 절충'했다고 비칠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이 나중에 만남 불발에 대해 "국익을 총체적으로 고려한 결정"이라고 한 것은 참사 수준의 실언이다. '휴가 때문'이라는 애초 설명과 앞뒤가 안 맞을뿐더러, 거창한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면 '중국 때문' 말고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 그런 뜻이 아니라고 수습하긴 했지만, 많은 사람은 과거 박근혜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진영 지도자 중 유일하게 천안문 망루에 올라간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물론 한미 관계는 이 정도 사건으로 흔들릴 만큼 허약하지 않다. 대통령 지지율 하락과 맞물려 필요 이상으로 이슈가 커진 측면도 있다. 다만 외교 결례니 의전 홀대니 같은 가십성 논란을 넘어, 이번 건은 우리 외교 안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부호를 남겼다. 컨트롤타워가 중심을 잡고 있는지, 이에 따라 일선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지, 동맹국과 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지, 무엇보다 우리 외교가 명확한 지향점과 원칙을 갖고 있는지 말이다. 펠로시가 떠난 뒤 중국은 "예의 바른 결정"이라고 했고, 미 조야에선 불편한 반응이 나왔다. 이게 의도한 결과는 아니지 않은가.
    기고자 : 임민혁 정치부 차장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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