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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숨을 나누는 시간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발행일 : 2022.08.09 / 여론/독자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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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숨이 쉬어지지 않는 증상이 계속되었다. 무엇이 원인인지 알 수 없었다. 마감을 앞둔 대본 때문인지, 최근에 만난 누군가와 겪은 갈등 때문인지, 앞으로 예정된 작업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떠오르는 이유는 많았지만 정확한 사유를 알 수 없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곧바로 드러누워 밀린 숨을 쉬기에 바빴다. 누워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몸의 이상은 없었기에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일어나야 했다. 생전 처음 신경정신과를 찾아갔다. 의사와 마주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제가 숨이 잘 안 쉬어지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몸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마음의 문제인데,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든 숨을 제대로 쉬고 싶은데…." 말하는 나도 듣기 힘든 횡설수설이 이어졌다. 의사는 말없이 그냥 듣고 있었다. 반응이 없다 보니 내 말이 어느 순간 자연스레 멈춰버렸다. "왜 말을 멈춰요?" "아,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서요." "마음을 잘 모르겠다면서요? 말하다 보면 조금은 알지 않겠어요?" "아, 그럴까요?" "증상을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해보실래요? 주제를 정하지 말고 시간을 정해봐요. 한 30분이면 어때요?" "30분을 말하라고요?" "마침 마지막 상담이니까 시간이 많아요. 나한테 말 좀 해줘요. 30분 동안."

    삼십 분은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삼십 분을 채우기 위해 온갖 말을 꺼내고 뱉었다. 연습 중인 공연이 어떤 이야기인지, 연출은 어떻게 할 건지, 다음 작업은 뭔지, 연극과 뮤지컬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나는 왜 공연 일을 시작했는지, 내가 처음 본 연극 제목은 무엇인지, 외둥이로 태어나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접한 책과 노래와 영화는 무엇인지, 그러다가 만난 연극이 얼마나 강렬하게 다가왔는지, 눈앞에 실제로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향해 말을 걸며 웃기고 울리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래서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바뀌고 있는 건지, 어쩌면 바뀌었던 순간의 강렬함 때문에, 바뀌지 않고 있음에도 바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건지.

    공연으로 시작한 가벼운 얘기는 인생에 대한 거대 담론으로 마무리되었다. 삼십 분을 말하는 동안 사십 년 인생 전체가 스쳐 지나갔다. 오랜만에 엄청난 에너지를 썼더니 숨이 가빠졌다. 나도 모르게 헉헉거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숨만 쉬었다. 의사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 숨 좀 잘 쉬어져요?" "네, 말을 너무 했더니 숨이 너무 가빠서, 숨이 저절로 쉬어집니다." "다행이네요. 다음에 올 때는 내 말 좀 들어줘요. 나도 숨 좀 쉬게." 병원 문을 나서면서, 나는 또 숨이 안 쉬어질 경우 누구를 찾아가서 말을 신나게 해볼까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일부러 많은 지인을 만났다.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려서 하루에 한 명씩 약속을 잡았다. 하루에 한 명씩 삼십 분간 말을 하면 매일매일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이야. 이렇게 보니까 좋네." "그래, 잘 지내? 별일 없고?" "말도 마. 내가 요즘 숨이 안 쉬어져서 신경정신과를 처음 갔거든. 근데 거기서…." "와, 거길 처음 갔어? 난 다닌 지 일 년 넘었어." "… 응?" "말도 마. 나도 일 년 전부터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거야. 근데 원인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고민 끝에 병원을 갔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30분이 넘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말하러 간 처지에서 말을 듣는 처지로 바뀌어있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주제가 종횡무진으로 달라지는 친구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내 숨이 안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열심히 들을 때의 숨도 열심히 말할 때의 숨만큼 잘 쉬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 말을 이어간 친구는 한 시간 지나서야 황급히 말을 멈췄다. "아! 내 정신! 네 얘기를 들어야 되는데!" "… 아니야, 잘 듣고 있어. 이제 숨 좀 잘 쉬어져?" "… 아, 숨이 가빠서 그런지 잘 쉬어져." "계속 얘기해.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얘기해. 그래서 너도 모르게 저절로 숨이 쉬어질 때까지. 나는 계속 들을게. 네 얘기에 맞춰서 천천히 숨을 쉬어가면서. 오늘 우리 둘이 숨 좀 실컷 쉬어보자."
    기고자 :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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