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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칼럼] 트럼프는 왜 평택 상공 헬기에서 소유욕을 불태웠나

    박정훈 논설실장

    발행일 : 2022.08.05 / 여론/독자 A3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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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현직 시절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이 2017년 11월이었다. 평택 미군 기지에 들렀다 헬기 편으로 서울로 향하던 중, 땅 위에 펼쳐진 거대한 건물군(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놀란 그가 "도대체 저게 뭐냐(What the hell is that?)"고 외쳤고 동승한 미 정부 인사가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이라고 알려주었다.

    이 일화는 2년 뒤 다시 방한한 트럼프가 한국 경제인 간담회에서 직접 소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내가 여태까지 본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것 중 하나였다"면서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향해 "정말 대단하다"고 거듭 치켜세웠다. 그런데 트럼프가 언급하지 않은 미공개 발언이 하나 더 있었다. 당시 헬기 안에서 트럼프는 "저걸 미국에 지었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는 얘기가 한국 측 관계자를 통해 전해졌다. 원하는 것은 꼭 손에 넣고 만다는 트럼프가 미국에 없는 최첨단 반도체 시설을 내려다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트럼프의 불타는 소유욕은 그로부터 4년 뒤 현실화됐다. 2021년 5월, 삼성이 20여 조원을 투자해 미국에 새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백악관을 방문해 미 대통령 측근들과 조율한 뒤 건립지는 텍사스주 테일러시로 결정됐다. 여기엔 7나노미터 이하의 초미세 라인이 들어설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규모도, 공정 수준도 평택급(級)의 최첨단 시설이 될 전망이다. 자국 영토 안에 반도체 생산망을 구축하겠다는 미 정부의 집념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테일러 공장 건설의 첫 삽을 뜨자마자 삼성은 추가 투자 계획서를 텍사스 주정부에 제출했다. 20년간 총 250조원을 투자해 생산 라인을 11곳 신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무려 11개였다. 계획이 공개되자 삼성 측은 "종료될 세금 감면 혜택을 연장하려 미리 신청서를 냈을 뿐"이라며 실제 몇 곳을 투자할지는 미정이라 했다. 그러나 '최대 11개'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이것은 생각할수록 무서운 일이다. 반도체 생산 기지를 놓고 평택과 텍사스가 경쟁에 돌입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삼성은 중국 시안과 미국 오스틴에 공장을 갖고 있지만 기술 난도가 낮은 구식 라인이다. 7나노 이하 초미세나 극자외선(EUV) 같은 첨단 공정은 모두 국내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한국과 미국의 투자 환경을 따져 유리한 곳에서 생산하겠다고 한다. 반도체 한 품목만으로 한국 전체 수출의 13%를 담당하는 삼성이 미국에 공장을 대거 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경제적으로는 물론 반도체 기지로서 한국이 갖는 안보 전략적 가치도 축소될 것이다.

    반도체 공급 사슬에서 한국과 미국은 경합 관계가 아니었다. 1990년대 인텔 등이 메모리에서 철수한 이래 미국은 설계와 장비, 한국·대만은 생산을 담당하는 분업 체계가 유지되어 왔다. 이 오래된 공식을 미국이 깼다. 이젠 미국 땅에서 생산까지 해야겠다고 한다.

    반도체뿐 아니다. 자국 내에 생산망을 구축하려는 미국 정부에 탄탄한 제조업 라인을 보유한 한국 기업은 최고의 타깃이 됐다. 미국은 '공급망 재구축'을 내세우며 우리 기업들을 향해 공장을 지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4대 그룹이 발표한 대미 투자액이 올해 들어서만 80조원에 달한다. 반도체(삼성·SK)에서 전기차(현대차), 배터리(LG·SK)까지 주력 업종이 일제히 미국행 오프쇼어링(해외 이전)에 나서고 있다. 미 정부의 공급망 재편 정책에 선제적으로 편승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일 것이다. 현지 공장을 매개로 미국과의 기술 동맹을 강화할 수 있다면 국가 경제적으로도 이득이다. 그러나 과도한 오프쇼어링은 성장 동력의 해외 이탈로 귀결될 수 있다.

    바이든의 욕심은 평택 상공에서 소유 본능을 폭발시켰던 전임자에게 뒤지지 않는다. 일본을 건너뛰고 한국부터 날아오더니 전용기에서 내리자마자 삼성 평택 공장으로 달려가 이재용 부회장을 붙잡고 투자 세일즈에 나섰다. 지난주 백악관에 초대받은 최태원 SK 회장이 29조원 투자 계획을 내놓자 바이든은 "생큐 토니(최 회장의 애칭)"를 세 번 외치며 러브콜을 연발했다. 국내 투자 때 대기업 회장들이 이런 대접을 받아본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미 정부가 외치는 '공급망 재구축'의 속을 뜯어보면 자국 이기주의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다른 나라의 핵심 공장을 끌어오겠다는 무서운 국가 의지가 담겨있다. 공장 하나 지으려 해도 송전선 연결에 몇 년을 끌고, 물을 끊겠다는 지자체 협박에 시달려야 하고, 법인세 인하가 "부자 감세"로 매도되는 한국적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이러다 '미국 내 삼성 반도체 공장 11곳'이 진짜 현실로 펼쳐질까 두렵다.
    기고자 : 박정훈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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