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세상이 놀랄 것이라던 히딩크 말, 4강 가니 알겠더라"

    정병선 기자

    발행일 : 2022.05.31 / 사람 A23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오늘 한·일 월드컵 개막 20주년
    박항서 베트남 감독 인터뷰

    "2002년 월드컵은 모든 경기가 특별했지만 최고의 경기는 2대0으로 이긴 폴란드와의 조별 리그 첫 경기였어요. (황)선홍이가 결승골을 넣었고, (유)상철이가 쐐기골을 넣었죠."

    2002 한일 월드컵 우리나라 대표팀 코치였던 박항서(63) 베트남 대표팀 감독이 당시 경기를 회상하며 웃었다. 2002 월드컵 20주년을 하루 앞둔 30일 박항서 베트남 대표팀 감독과 전화로 만났다. 박 감독은 "당시 월드컵팀은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며 "'오대영'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준비하는 과정 하루하루가 속 편한 날이 없었다"고 했다. 박 감독은 "스포츠는 결과다. 결과가 좋으니 사소한 것들과 어두웠던 순간들이 다 묻히고 사라졌다"면서 "상처로 남았다면 어떻겠어. 영웅이란 말이 과연 나오기나 했을까"라고 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년 전 한국을 월드컵 4강으로 이끌며 축구 영웅으로 떠오른 것처럼, 지금 박 감독은 '베트남의 히딩크(쌀딩크)'로 불리며 베트남의 축구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박 감독은 지난달 22일 하노이에서 열린 동남아시안(SEA)컵 축구 대회 결승에서 태국을 1대0으로 꺾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그는 2017년 감독으로 부임해 '동남아시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이 대회에서 2019년 베트남에 60년 만에 첫 우승컵을 안겼다.

    박 감독은 "거스 히딩크 감독에 대한 존경은 진행형"이라고 했다. 박 감독은 "16강이 목표였는데 히딩크 감독은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했어요.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16강, 8강, 4강까지 올라가니 분위기가 급속도로 치달아 정신이 없었다"며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박 감독은 당시 월드컵 '4강 진출의 특급 비결'도 털어놨다. 박 감독은 "인천 문학구장에서 우리(한국)가 포르투갈을 누르고 월드컵 16강 진출을 확정한 뒤 DJ(김대중 대통령)가 라커 룸에 와 선수들을 격려하는데 홍명보(주장)가 병역 문제를 건의했죠. DJ가 즉석에서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이게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버렸지요. 선수들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니까요. 그런 엄청난 자극은 아무리 히딩크 감독이라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박 감독은 그때 라커 룸 분위기를 '월드컵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박 감독은 여전히 월드컵 3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고 했다. 박 감독은 "4강에서 너무 아쉬운 경기를 했다.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 너무 지쳐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고 했다. 그는 "16강에서 이탈리아, 8강에서 스페인까지 잡았으니 정말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인 거다"라며 "준결승에서 독일한테 진 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3·4위전서 터키에 진 거는 참 두고두고 아쉽다"고 했다.

    박 감독은 2002년 당시 함께했던 멤버를 회상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상철이가 생각나네, 아, 내가 왜 그러지? 최소 10년이라도 더 살다 갔으면 했는데 너무 빨리 갔어"라며 울먹였다.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은 2019년 췌장암 4기를 진단받은 뒤, 작년 세상을 떠났다.

    박 감독은 당시 함께 코치 생활을 했던 핌 베어벡 감독에 대한 아쉬움도 나타냈다. 네덜란드 출신 핌 베어백 감독은 지난 2019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상철이도 그렇고 핌 베어벡도 벌써 세상을 떠났으니….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기 힘듭니다. 2019년 3월 AFC(아시아축구연맹) 총회가 열린 말레이시아에서 만났는데 머리카락이 없어서 왜 이렇나 했어요. 위암 수술 했다고 해서 놀랐고, 큰 충격을 받았지요. 한국 다녀오면서 인삼 진액을 사와 선물하며 쾌유를 빌었는데. 베어벡은 나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았는데."

    박 감독은 "한국 축구가 혁신적으로 변화해 2002 월드컵 20년이 지난 지금 손흥민 같은 스타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 축구의 발전 배경에는 20세 이하 선수를 대상으로 한 '골든에이지 프로그램'과 'K리그의 22세 이하 선수 의무 출전제'가 있었다"며 "축구협회와 프로연맹의 행정적인 변화가 있어 가능했다"고 말했다. 대한축구협회(KFA)의 '골든에이지' 프로그램은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축구 강국의 유소년 시스템을 연구하여 한국 실정에 맞게 개발했다.

    박 감독은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하는 월드컵 20주년 행사(6월 1~6일)에 초대받았지만, 아프가니스탄 등과의 A매치가 있어 귀국하지 못했다. 그는 "히딩크 감독, 선수들도 보고 싶지만 아쉽게 됐다"고 했다. 박 감독은 "몸은 해외에 있지만 2002년 당시 함께 뛰었던 황선홍·홍명보 감독의 활약상, 안정환·이천수 선수 등이 TV 예능 프로에 등장해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 내 일처럼 행복하다"고 했다.

    박 감독은 월드컵 본선에서 1분도 뛰지 못한 김병지, 윤정환 선수 등 5명에 대한 미안함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고 했다. "히딩크 감독께 이 선수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자고 제안했지만, 감독이 결정한 것이니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내(나)한테 묻지 말고, 히딩크 감독에게 직접 물어봐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이유를 밝힐지도 모르죠."
    기고자 : 정병선 기자
    본문자수 : 2585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