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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이란, 당장은 보이지 않는 그늘 속 사물을 포착하는 것

"나는 문학 창작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즉 평범한 대상을 미래 시간의 너그러운 거울에 비칠 모습으로 그리는 것, 아득히 먼 미래의 후손들만이 알아보고 가치를 인정해줄 그 향기로운 유연함을 우리 주위의 대상 속에서 찾아내는 것. 아득히 먼 미래에는 지금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이루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저절로 절묘하고 흥미진진한 것이 될 거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베를린 안내' 중에서

2022년 어느 봄날 저녁, 오렌지색 상의를 꺼내 입었다. 드레스 코드가 있는 파티에 가기 위해서였다. "오렌지. 해석과 연출은 자유롭게. 오렌지의 부재를 통해 역으로 오렌지의 징후를 드러내는 예술적 방식도 가능합니다." 러시아계 미국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123번째 생일과 '나보코프 단편 전집'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니까 광란의 육체 파티가 아니라, 은은하게 미쳐있는(?) 정신의 파티였다.

파티는 자기소개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가자들은 인덱스 카드 또는 쪽지에 자신이 좋아하는 나보코프 단편의 문장이나 구절 일부를 적어서 와주십시오. 자기소개 대신 나보코프의 문장을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되지 않는 참석자들은 돌아가면서 자기 문장을 읽었다. 내가 고른 문장은 '구름, 성, 호수'에 나오는 한 남자에 대한 묘사였다. "한번 세탁하면 줄어드는 소심한 셔츠 중 하나를 샀다. 여담이지만, 머리를 항상 단정하게 다듬고, 눈은 지적이고 친절해서 호감 가는 그 왜소한 남자에게 그 셔츠는 너무 컸다."

나는 왜 이 문장을 골랐을까. 누군가를 묘사하는 문장이기에, 자기소개 대신 낭송하기 적합하다. 그리고 단 두 문장이지만 흥미로운 대구를 이룬다. 먼저, 셔츠와 그 남자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남자도 세상의 무게에 짓눌린 듯 왜소하고, 셔츠도 세탁의 무게에 짓눌려 줄어든다. 그 남자는 얼마나 왜소한 것인지, 줄어든 셔츠마저도 너무 크게 느껴진다. 나보코프는 '소심한'이라는 심리적 수식어를 물건인 셔츠에 주고, '왜소한'이라는 물리적 수식어를 사람인 남자에게 주어 미묘한 긴장을 만들었다. 남자가 셔츠를 입음으로써 그 물성과 마음은 통합되고, 긴장은 해소될 것이다. 아, 이 문장의 맛을 다른 이들도 느껴주었으면!

강연이 시작되었다. 번역자는 상기된 얼굴로 자기가 어떻게 나보코프에 '입덕'(좋아서 빠져듦)하게 되었는지를 회고했다. 대학생 시절, 나보코프의 '베를린 안내'라는 단편을 읽고, 아, 이런 세계라면 평생 좋아해도 되겠구나, 라고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베를린 안내' 중에서도 특히 다음 단락이었다.

"오늘은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의 띠 위에 누군가 손가락으로 '오토Otto'라고 써놨더군. 두 개의 부드러운 O가 한 쌍의 온순한 자음 양옆을 지키는 그 이름이, 두 개의 구멍과 발 없는 굴로 이루어진 하수도관 위에 쌓인 고요한 눈의 층과 얼마나 아름답게 잘 어울리는지 생각했어." Otto라는 글자가 바로 하수도관을 닮았다는 점에 그 대학생은 열광했다. 실로 그렇지 않은가. 처음과 끝에 있는 두개의 O는 하수도관의 양 끝처럼 생겼고, tt는 그 양 끝을 잇는 원통 같지 않은가.

글자 모양에마저 뜻을 싣는 나보코프에 대해 들으면서, 나는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를 떠올렸다. '그늘에 대해서'에서 다니자키는 이렇게 말했다. "미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 내는 그늘의 무늬, 명암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갈한 전통 화장실에 깃든 그늘, 긴 처마가 만드는 음영, 그늘과 빛이 함께 깃든 황금의 침통한 아름다움에 대해 탐닉하듯이 서술한다. 그러한 그늘이야말로 얼마나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고, 명상에 젖게 하는지를 나직하게 주장한다.

탐미적인 산문 '그늘에 대하여'의 원제는 '음예예찬(陰翳禮讚)'이다. 그늘을 나타내는 단순한 글자들도 있는데, 왜 다니자키는 '陰?(음예)'와 같이 복잡한 글자를 고집한 것일까. 획들이 모여 만드는 그늘을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획수가 많은 한자를 선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눈 덮인 하수도관 위 낙서로는 Otto가 제격이듯이, 그늘을 나타내는 글자로는 획이 복잡한 陰?가 제격인 것이다.

다니자키는 이 그늘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자기 문학의 목표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가고 있는 그늘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되불러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하고, 그 벽을 어둡게 하고, 지나치게 밝아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쓸데없는 실내 장식을 떼내고 싶다."

대상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각의 복원은 다니자키뿐 아니라 나보코프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가치 있고 유의미하겠지.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말이야. 차장의 돈가방, 차창을 뒤덮은 광고 전단, 그리고 우리 증손자들이 상상해볼지도 모를, 노면전차 특유의 그 덜컹거리는 움직임도, 모든 것이 세월이 흘렀다는 이유로 고귀한 것이 되고 정당화될 테지." 지금은 범용해 보이는 사물들도 세월이 흐르면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나보코프는 생각한다.

이 세월의 힘을 시간의 그늘이라고 불러 보자. 이 시간의 그늘 속에서야 비로소 당장은 잘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드러날 것이다. 창작의 의의는 바로 그러한 그늘 속 사물을 포착하는 데 있다고 나보코프는 말한다. "나는 문학 창작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즉 평범한 대상을 미래 시간의 너그러운 거울에 비칠 모습으로 그리는 것, 아득히 먼 미래의 후손들만이 알아보고 가치를 인정해줄 그 향기로운 유연함을 우리 주위의 대상 속에서 찾아내는 것." 이것은 목전의 필요에 급급하지 않고, 먼 미래의 시각을 상상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다. 미래의 시각이 된다는 건 더 젊어지는 동시에 더 원숙해지는 일이다.

서점 주인이 나보코프의 생일을 기념하는 작은 케이크를 마련했다. 그늘을 만드는 희미한 조명 아래, 촛불을 켰다. 그 촛불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경황 없는 사회에 아직 인문 정신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실적을 쌓기 위한 공허한 학술대회보다는 독립 서점이라는 조용한 그늘 속에서 있을 것 같다고. 기고자 :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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