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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서정시대] 아이를 안아준 적 언제였나요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발행일 : 2022.05.19 / 여론/독자 A3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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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배우 이혜영을 인터뷰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는 아버지인 이만희 감독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깊은 포옹'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한번 안으면 가슴부터 무릎까지 달라붙도록 힘 있게 안아줬다고 했다. 실로 강렬한 포옹이었다며 웃었다. "그게 나한테 최고의 유산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우리 애들 키울 때 으스러지도록 안아줬어요."

    오은영 박사를 만나 그 이야기를 했더니, 또 다른 일화를 보태주었다. 생의 의욕을 잃은 한 여성에게 구원처럼 떠올랐다는 유년기의 한 장면. 원양어선 타던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에 오던 길에, 울고 있던 어린 딸을 만나 들꽃을 꺾어주고 꼭 안아줬다고.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 그때 그 가슴팍의 감촉과 꽃향기가 살아나 충동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사랑은 청각('사랑해'라는 말)과 시각(따스한 눈빛), 미각(매일의 밥상)으로도 전해지지만, 왜 촉각은 그토록 강렬할까. 오은영 박사는 '안아주는 행위는 자동차 기름이 가득 차는 것처럼, 감정의 주머니를 꽉 채워주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자주 만나지 못한 부모였다 해도, 그는 자신의 정신 에너지를 다 끌어모아 스킨십을 했을 거라고. 그 진한 감정의 농도에 접속되면 생명 에너지가 활성화된다고 했다. "그래서 저는 아이를 온 몸으로 껴안아 주라고 해요. 단 몇 초라도 진심을 다해서 에너지를 주라고요." 기억은 그토록 주관적인데, 기필코 살아남아 사람을 살린 기억은 '함께한 빈도가 아니라 강도'였다. 촉각의 맹렬함이다.

    얼마 전 초등학생 아이의 알림장에서 '친구 몸에 절대 손대지 않기'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마스크로 표정도 볼 수 없고,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도 할 수 없다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친구의 몸이 뿜어내는 떨림과 울림의 주파수를 읽어낼까. 함께 노는 친구와 안전하게 몸이 닿거나 부딪쳐 보지 않고 어떻게 육신의 경계와 범위를 감지할까. 최근 출간된 '한없이 가까운 세계와의 포옹'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신체 접촉 부족이 야기하는 우울과 불안, 공감 능력과 면역 기능 저하를 피부 굶주림을 뜻하는 '스킨 헝거(skin hunger)'로 표현했다.

    코로나와 디지털 팬데믹을 거치면서 우리는 지금 '살갗의 굶주림'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나 또한 온종일 노트북과 스마트폰만 터치하다 보면 내 몸이 살과 뼈로 이루어진 중력 덩어리가 아니라 허공에 이미지로 붕 떠있다는 환각에 빠진다. 그런 날은 문을 열고 뛰어들어오는 아이의 몸에 내 몸을 포갠다. 한 존재를 얼싸안을 때 느끼는 황홀경은 형언하기 어렵다. "매일 포옹을 받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릴 확률이 32% 낮고 회복 속도도 빠르다"고 콜롬비아 의대 켈리 하딩 교수도 '스킨십의 충전 효과'를 전했다.

    촉각은 여러 방식으로 존재의 윤곽을 잡아준다. 고양이 목덜미를 쓰다듬을 때의 보드라움, 사랑하는 이의 무릎을 베고 누울 때의 안도감, 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찌를 때의 공격성, 코끝으로 스며드는 뜨거운 커피 향, 무릎 담요의 기분 좋은 묵직함 등. 때로는 반려묘가 스윽 제 몸을 부비며 다리 사이로 지나가거나, 내 무르팍을 차고 앉아 몰아지경으로 자기 털을 핥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고양이의 행복은 '촉각의 자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눈만 뜨면 일방적으로 덮치는 시각 정보와는 달리 촉각은 내 사지의 접촉으로 세상을 쪼개서 이해하고 직접적으로 다루도록 허락한다. 간혹 머릿속이 엉켜 있을 때는 잘 드는 칼로 연필을 깎아 흰 종이 위에 단어들을 쓰면, 막연했던 생각이 손끝을 타고 활자로 정리된다. 좋은 문장, 좋은 디자인의 공통점은 눈이 아닌 피부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럴 땐 우리 몸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촉수로 뒤덮힌 것만 같다. 최근 인터뷰한 일본의 텍스타일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에게서 배운 것도 이런 '촉의 본질'이었다. 어시장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것과 봉제 공장에서 천을 재단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그의 설명에 나는 무릎을 쳤다.

    여덟 살 무렵 부터 나 또한 가내수공업으로 습자지 도안 위에 자개 문양 붙이는 일을 하거나, 털실로 머플러나 스웨터를 짰다. 우윳빛 조개와 털실, 각종 바늘의 다양한 감촉이 손끝에 가져다주는 그 분명하고 뿌듯한 감각을 좋아했다. 어쩌면 나는 갓난아기였을 때 느낀 '살갗의 굶주림', 희미해진 자아상을 그런 식의 또렷한 감각으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리적 실체로 던져졌기에 우리는 이 세계와의 적정한 마찰, 제 몫으로 부여받은 촉각의 총량을 채우려 드는 게 아닐까. '존재하고 싶다'는 살갗의 인정 욕구는 그토록 끈질긴 법이다.
    기고자 :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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