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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산소·삶의 터전 두고 우크라 떠날 순 없어"

    르비우(우크라이나)=정철환 특파원

    발행일 : 2022.05.17 / 사람 A25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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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에 남은 한국인들

    "길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 산소에 들렀어요. 차마 발이 안 떨어지더군요."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한국인들이 있다. 서부 중심 도시 르비우에서 15일(현지 시각) 만난 서진택(31)씨가 그중 한 사람이었다. 지난 4월 22일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다섯 살, 두 살 아이를 데리고 러시아군에 포위된 동부 국경의 대도시 하르키우를 탈출, 3박 4일간 장장 1200여㎞를 달려 이곳 서부 지역까지 왔다. 우크라이나에는 아직 10여 명의 한국인이 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월 11일 우크라이나 전 지역에 대한 여행 경보 4단계가 긴급 발령되면서 700여 교민 전체에게 긴급 소개령이 떨어졌지만, 그는 떠날 수가 없었다. "아버님이 평생을 바친 교회가 있어요. 너무나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2009년 돌아가신) 아버님 산소도 그곳에 있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2016년 한국으로 귀국해 가족 중엔 서씨만 남아 있었다.

    하르키우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기도 했다. 부모님을 따라 2004년 우크라이나에 와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영주권을 얻고, 우크라이나 여성과 결혼해 단란한 가족도 꾸렸다. 하지만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집 근처 300m까지 포격이 쏟아졌어요. 전등이 망가져 떨어지기도 했죠. 수퍼마켓·식료품점이 문을 닫고, 전기와 가스, 물까지 끊겼었어요. 시내에 러시아군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하르키우 시민 약 40%가 피란을 떠났다. 가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남아 버틸 수만도 없는 상황. 결국 아내와 함께 결단을 내렸다. "제가 출발하자 비가 오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러시아군의 포격이 잦아들어 사고 없이 올 수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동과 서를 가르는 드니프로강을 건너 서부로 접어들자, 거짓말같이 비가 그쳤다고 한다.

    방대식(55)씨와 김 데이비드(62)씨는 현재 수도 키이우에 머물고 있다. 지난 2월 급하게 키이우를 떠났다가, 최근 폴란드를 거쳐 잠시 돌아왔다. 14일 르비우에서 만난 두 사람은 "우선 이곳 상황을 파악하러 왔다"며 "우크라이나를 떠나 있는 (90여 명) 한국인 선교사님들은 못 들어오시는 상황"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현재 여행 금지 4단계 국가인 우크라이나 입국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미국 시민권자라 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선교사인 방씨는 집과 일터(신학교)가 러시아군 점령지였던 부차와 이르핀 쪽에서 멀지 않은 키이우 외곽으로, 직접적인 피해도 당했다. 그는 "학교에 두었던 차량을 러시아군이 탈취해 이용하다, 차 앞에 'V'자를 새겨 놓고 버려둔 채 퇴각했다"며 "마음씨 좋은 현지인이 숲에서 내 차를 발견, 연락을 해와 한번 가볼 예정"이라고 했다. 15일 통화에서 두 사람은 "수도, 전기, 가스 등이 잘 나오고, 수퍼마켓도 거의 다 열었다"고 키이우 상황을 전해왔다.

    우크라이나의 한국인들은 지금 이곳을 떠나야 할지, 계속 남아 있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그들은 "일단 나가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힘든 제도적 상황 때문"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에 재입국하게 되면 여권법 위반으로 여권 효력이 중단되고, 고발당할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 난민들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영주권자까지 재입국을 막는 것은 아쉽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교민은 "재산과 사업체를 모두 팽개치고 몸만 빠져나와 상황이 안정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이도 있다"며 "정부가 예외적 여권 사용 제도 등을 잘 활용해 이들을 배려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고자 : 르비우(우크라이나)=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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