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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정철환 특파원 우크라 르비우 르포] 새벽 3시 공습경보, 방공호로 뛰었다

    정철환 특파원

    발행일 : 2022.05.16 / 종합 A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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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오전 3시 27분(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서부 중심 도시 르비우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시끄럽게 울리는 스마트폰에 "위험! 공습경보!"라는 메시지가 두 번 연속으로 떴다. 호텔 바깥을 보니 깜깜했던 길 건너 건물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비상등이 켜진 호텔 계단을 허둥지둥 내려오니 매니저가 "얼른 방공호로 내려가라"고 손짓했다. 꼬마전구 하나 달랑 켜져 있는 약 20㎡ 크기의 지하 1층 비품 창고가 이 호텔의 방공호였다.

    공습경보는 약 2시간이 지난 5시 22분에 해제됐다. 호텔 측은 "다행히 시내 폭격은 없었다"고 투숙객을 안심시켰다. 우크라이나군에 따르면, 해당 공습경보는 러시아군이 르비우 인근 야보리프의 군 시설을 공격한 데 따른 것이었다. 러시아군이 쏜 미사일 4발 중 2발이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공중에서 요격됐고, 나머지 2발은 야보리프에 떨어졌지만 사상자는 없었다고 한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이러한 야간 공습경보와 대피는 일상이 됐다. 호텔에선 손님이 체크인할 때 방공호 위치를 알려주며 "공습경보가 울리면 휴대전화와 여권, 지갑만 챙겨 내려오라"고 했다.

    개전 후 이날까지 81일간 르비우에서 울린 공습 경보는 총 106회. 우크라이나 전체로는 총 8331회의 공습경보가 있었다. 아침에 만난 살로몬(50)씨는 "지난 8일 이후 일주일 만의 공습경보"라며 "개전 후 첫 달은 하루 3~5번, 둘째 달은 하루 2~3번씩 경보가 울리면서 많은 이들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기자도 새벽 3시의 공습경보로 르비우의 첫날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르비우는 폴란드 국경에서 60여㎞ 떨어진 도시다. 현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부 돈바스와 남부 헤르손으로부터 각 900㎞, 700㎞ 떨어져 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개전 이후 줄곧 이곳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대포와 탄약, 무인기 등 서방이 지원하는 무기와 장비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 우크라이나 곳곳에 보급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를 방문하자 르비우 외곽의 유류 저장고가, 지난 3일에는 역시 시 외곽의 변전소가 공격을 받았다. 호텔 매니저 페트루소씨는 "시내에도 언제든 미사일이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있다"고 했다.

    이 도시의 대부분 빌딩은 지하실을 방공호로 지정해 놓고 있었다. 르비우시 당국은 "(전쟁 발발 후) 총 6000여 개의 방공호를 새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건물 외부와 최소 2개 이상의 벽으로 분리되어 있고, 2개 이상의 출구와 물을 얻을 수 있는 설비가 있으면 방공호로 쓸 수 있다. 식당이나 카페 등에는 '이쪽으로 대피하라'는 큼지막한 표시가 있었다.

    심지어 16세기에 만들어진 교회의 지하 무덤까지 방공호가 됐다. 르비우 구(舊)도심의 문화 유적 '성베드로와 성바오로 성당' 지하 무덤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10여 개의 묘실(墓室)이 공습 때 최대 400명이 몸을 피할 수 있는 방공호로 변신한다. 교회 측은 "화강암 돌로 튼튼하게 지어져 어지간한 콘크리트 건물 지하보다 안전하다"며 "망자(亡者)의 안식처가 이제는 산 자의 피란처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시 남쪽의 종합 공연시설 '도브젠코 센터' 지하 역시 방공호로 지정됐다. 무대 아래 지하층의 총 3개 공간을 인근 주민들이 공습 시 이용하도록 했다. 100~150명씩 총 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센터 책임자 타샤씨는 "600여 명이 사망한 남부 마리우폴의 극장과 매우 유사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마리우폴 극장에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했던 곳은 무대 오른쪽 아래 지하실이었다. 같은 위치의 공간에 가보니 창고로 쓰이는 큰 공간에 물과 비상식량이 놓여 있었다. 안전 책임자 유라씨는 "러시아군은 마리우폴 극장 공격 당시 로켓 7발로 극장 위층 구조물을 모두 무너뜨린 다음, 전폭기로 지하 대피소를 정확히 타격했다"며 "방공호에 숨은 민간인을 겨냥한 고의적 학살이고, 르비우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르비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내 방공호들은 대부분 전쟁에 대비해 지은 시설이 아닌, 기존 건물의 지하 공간을 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재래식 포격과 미사일·폭격에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지만 화학무기나 핵무기 공격에는 무용지물이다. 르비우의 우크라이나군 관계자는 "(푸틴이) 화학무기나 핵무기를 쓸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본다"며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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