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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2030] '스포츠 드라마'는 돈으로 못 산다

    양지혜 스포츠부 기자

    발행일 : 2022.05.13 / 여론/독자 A2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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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면 안 될 일이 거의 없는 세상이라서 스포츠만큼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영예의 최후 보루로 남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기름 재벌들의 팀이 최근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또 미끄러졌을 때 격렬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를 느꼈다. 챔스 트로피를 들어야 자타 공인 유럽의 명문 구단이 된다. 카타르 국왕은 파리생제르맹(PSG)을 11년 전 인수하고 약 13억유로(약 1조7500억원)를 퍼부었는데 올 시즌 챔스도 16강에서 끝났다. '메시-음바페-네이마르' 초호화 삼각편대도 한계가 있었다.

    '돈 지름'에 관해선 맨체스터시티도 일가견이 있다. 맨시티는 2008년 아랍에미리트(UAE) 부호 셰이크 만수르가 인수한 뒤 비싼 선수들을 쓸어담았다. 2016년엔 펩 과르디올라 감독을 영입하고 약 11억유로(1조5000억원)를 썼는데 매년 챔스 우승에 실패했고 올해도 4강에서 멈췄다. 탈락 직후 멍하게 서있는 과르디올라를 보면서 나는 사악하게 웃었다. "역시 챔스는 돈으로 안 돼!"

    반면 돈 없는 팀이 우승하면 순도 100% 프로이데(freude·기쁨)가 찾아온다. 지난달 스페인 국왕컵 결승전을 보며 용솟음치는 프로이데를 느꼈다. 레알 베티스와 발렌시아CF가 이날 격돌했다. 베티스는 세비야 노동자들의 시민구단이고, 발렌시아는 싱가포르 재벌(피터 림)이 구단주다. 양 팀은 120분을 뛰고도 1대1로 비겨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베티스의 2번 키커를 보고서 심장이 뛰었다. 호아킨 산체스(41)였다. 꼭 20년 전 관중석이 붉었던 대한민국 광주에서 월드컵 승부차기를 실축하고 눈물 쏟던 청년이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어 골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 두 손을 힘껏 모으고 기도했다. "축구의 신이시여, 호아킨은 꼭 성공하게 해주세요. 그가 실축해서 우는 걸 두 번은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

    호아킨은 20년 전과 비슷하게 주춤주춤 뛰어가더니 오른발로 골대 구석을 향해 찼다. 이번에도 공이 골키퍼 손바닥에 걸렸다. 결과는 달랐다. 공은 마찰을 이겨내고 더 멀리 진격해 골망을 갈랐다. 축구의 신이 기도에 응답해주었다!

    호아킨은 '찢어지는 흙수저' 출신인데 남달랐던 재능 덕분에 16세 때 베티스에 입단해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115년 역사의 베티스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양분하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만년 조연인 가난한 구단이다. 라리가는 1935년, 국왕컵(Copa Del Rey)은 1977년에 한 번씩 우승했다. 그리고 '젊은 호아킨'이 이끌던 2005년에 두 번째 국왕컵 우승을 했고 올해 세 번째 우승을 했다.

    2005년 우승이 얼마나 기뻤으면 호아킨은 그해 여름 세비야 대성당에서 결혼할 때 몸통만 한 우승컵을 주례단에 놓고 혼인 서약을 했다. 세계 정상급 윙어였던 그는 "심장이 가리키는 곳에서 남은 축구 인생을 불태우겠다"며 2015년 연봉을 대폭 자진 삭감하고 고향 팀으로 돌아왔고, 승부차기까지 이겨내며 국왕컵 트로피를 17년 만에 다시 들었다. 이런 드라마는 돈으로 쓸 수 없어서 스포츠를 사랑한다.
    기고자 : 양지혜 스포츠부 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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