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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글쓰기로 수메르인과 만나는 방법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발행일 : 2022.05.10 / 여론/독자 A3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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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 한 친구의 별명은 '대서소'였다. 그만큼 글씨를 잘 썼을 뿐 아니라 뭔가 많이 배운 어른의 풍모가 느껴지는 글씨였다. 월말고사 성적표가 나오면 대서소에게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부모님 대신 성적표 확인 문구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용의주도한 대서소는 그중 한 명의 부탁만 들어줬는데, 혹여 여러 개를 써줬다가 같은 필체가 적발될까 봐서였다. 그렇게 대서소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같은 뻔한 문장을 친구 성적표에 써주고 라면이나 콜라 같은 것을 대가로 챙겼다. 자신의 성적이 떨어졌을 땐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자기 성적표에 글을 써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군대에 '차트병'이란 보직은 없을 것이다. 전지(全紙)를 여러 번 접은 자국으로 행을 만든 뒤 굵은 매직펜으로 글씨를 쓰던 병사다. 차트병의 글씨체엔 특정한 매뉴얼이 있었다. 이를테면 '받침 ㅇ'을 물방울이 가로누운 형태로 쓰는 식이었다. 한때 선망의 대상이던 차트병은 모두 파워포인트로 대체됐다.

    글씨를 쓴 게 언제였던가. 남의 글씨를 본 건 또 언제였던가. 부조금 봉투 뒷면에 이름 석 자 쓴 게 최근의 필기 행위였던 것 같다. '이곳에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나 '개인 사정으로 오늘 하루 쉽니다' 같은 글씨를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글씨는 아득하고 희미하다.

    신문기자는 비교적 최근까지 글씨를 써야만 먹고사는 직업이었다. 취재 수첩을 들고 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끄적거려야 했다. 그러나 요즘은 수첩에 볼펜으로 쓰는 기자를 보기가 어렵다. 기자회견장은 흡사 타이핑 경연대회장 같다. 타이핑을 할 수 없으면 녹음을 하고 뭔가 베껴 써야 하면 사진을 찍는다.

    손글씨로 쓴 신문사 작문 시험 채점을 하다 보면 글씨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잘 쓴 글씨는 100명 중 한두 명 정도다. 대부분은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글씨'이고 몇 명은 말 그대로 악필이다. 물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도 유려한 문장을 소금 벼락 맞은 지렁이 같은 글씨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작년 7월 대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글씨 쓰기 대회를 열었는데 최우수상 3명 중 2명이 베트남 출신 아이들이었다. 우수상 6명 중에서도 5명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었다. 버튼이나 자판을 눌러 한글을 배운 아이들보다 초등학교에서 공책에 글씨를 쓰면서 한글을 배운 아이들이 글씨를 훨씬 잘 쓴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손글씨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맘에 드는 손글씨 폰트를 돈 주고 사서 스마트폰에 저장해놓고 쓴다.

    글씨 쓸 일이 없으니 글씨를 잘 쓸 수 없다. 대표적인 글쓰기 훈련인 초등 저학년 일기 숙제는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일기 검사는 인권 침해'라고 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 인권이 신장되니 부모 등골이 휘었다. 아이의 손글씨를 걱정하는 부모들이 손글씨 과외로 몰린다고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모든 어린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의무가 있다고 규정한 헌법의 인권 침해 여부를 당장 검토해야 한다.

    요즘 손글씨가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백화점이나 도서관 손글씨 강좌에 사람이 몰리고 캘리그래피 책들도 많이 팔린다고 한다. 교보문고가 올해로 8년째 개최하고 있는 손글씨 대회에는 매년 수천 명이 글씨를 써서 응모한다.

    미국에서는 매년 1월 23일을 '손글씨의 날'로 정해 각종 행사를 연다. 우리도 이런 이벤트가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인간이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것을 기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념한단 말인가. 6000년 전 수메르인이 글씨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동굴 속에서 조약돌이나 과일 씨앗으로 기록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것은 종이의 저항을 뚫고 펜촉을 마찰시켜 뇌에 불꽃을 일으키는 행위다. 글을 망치지 않으려면 머릿속에서 문장을 완성한 뒤 손과 팔의 근육을 움직여 글자를 써나가야 한다. 이 글씨가 오랜 시간을 견뎌 먼 후대에 전달되리라는 믿음도 가져야 한다. 그렇게 쓰다 보면 점토판에 쐐기 문자를 새겨 쓰던 수메르인과 만나게 된다. 그들의 쓰기와 나의 쓰기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인들과 만나기 위해 피라미드를 쌓거나 구리를 벼려 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나뭇가지를 쥐고 땅바닥에 글씨를 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속에 있다. 그처럼 손글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류의 유산인 것이다.
    기고자 :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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