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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에 맞서다 사형선고… 펜으로 싸운 저항시인

    김성현 기자

    발행일 : 2022.05.09 / 종합 A2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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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지하 1941~2022

    "스무 살이던 4·19 시절부터 가르침과 깨우침을 줬던 사상이 민세(民世) 안재홍의 중용(中庸)이었다. 내가 평생 걸어온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큰 힘이 된다."

    8일 별세한 시인 김지하(81·본명 김영일)는 지난 2011년 민세상 사회통합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직후 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세상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민족운동가·언론인·역사학자로서 민족 통합을 실천했던 안재홍(1891~1965) 선생을 기리는 상이다.

    전립선암 등으로 투병하던 시인이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전 고백처럼 그의 80여 년 삶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역설적으로 '중용'이었다.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청년 김지하는 학부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64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에 나섰다가 4개월간 복역한 것이 시작이었다.

    1970년에는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과 장성(將星),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서 부정부패와 비리를 질타하는 저항시 '오적(五賊)'으로 다시 필화를 겪었다. 당시 시인이 풍자적 의미로 썼던 '오적'은 지금도 사회적 병폐를 풍자하는 상징적 언어가 되고 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1980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투옥을 거듭하는 중에도 시인의 절창(絶唱)은 대학가와 저항 세력 사이에서 시와 노래로 은밀하지만 지속적으로 불려나갔다. 그의 시에 곡조를 붙인 '타는 목마름으로'와 '새' 같은 민중 가요가 대표적이다. 1975년 옥중에서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의 '로터스' 특별상을 받았다. 당시 수상을 계기로 그의 석방 여부가 국제사회의 인권 문제로 떠올랐다.

    역설적으로 그가 유불선(儒佛仙)과 동학 사상, 생명론에 경도되기 시작한 것도 투옥 시절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 시인은 본격적으로 생명 사상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1991년 일부 학생 운동권이 반독재 투쟁을 이유로 분신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택하자,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조선일보 칼럼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시인은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면서 생명을 경시하는 투쟁 방식을 정면 비판했다.

    일부 세력은 그를 '변절자'와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시인은 그의 구명 운동이 계기가 되어 출범한 민족문학작가회의로부터 제명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인은 "나는 작가회의에 아예 가입한 적이 없다"고 받아쳤다. 훗날 "박정희 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7년이나 수형 생활을 했고, 좌파 진영이 극단적이던 시절에는 그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좌우로부터 지독한 비판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시인이 중용의 길을 걷고 있다는 방증"(김진현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라는 재평가를 받았다. 2018년 본지 인터뷰에서 시인은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외동딸인 김영주(1946~2019) 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과 1973년 4월 결혼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작가)씨와 차남 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학관 관장)씨가 있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그래픽] 김지하가 걸어온 길
    기고자 :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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