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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크라의 '2300년 역사' 약탈하다

    파리=정철환 특파원

    발행일 : 2022.05.02 / 종합 A2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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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4세기 유물 등 문화재 2000점 강탈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인 러시아군이 주요 점령지에서 우크라이나의 보물급 문화유산 약탈에 나서고 있다. 과거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 점령지 일부에서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인과 러시아 문화를 핍박하고 있다며 전쟁을 일으켜 놓고, 정작 자신들은 우크라이나의 문화를 말살하려 든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마리우폴 시 당국은 지난 29일(현지 시각) 소셜미디어를 통해 "러시아군이 마리우폴 내 미술관과 박물관 세 곳에서 도합 2000점이 넘는 미술품과 문화재를 압수해 가져갔다"고 밝혔다. 마리우폴은 남부 아조우해 연안의 항구도시로, 2개월이 넘는 포위 공격 끝에 최근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제외한 도시 전체가 러시아군에 넘어갔다.

    약탈된 미술품 중엔 마리우폴 출신 19세기 풍경화가 아르히프 쿠인지의 대표작과 러시아의 낭만주의 화가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작품 등 유명 미술품 10여 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점당 가격이 수십만~수백만 달러를 호가하는 것들이다. 시 당국은 "손으로 쓴 토라(유대경전), 1811년판 그리스어 신약성경 등 가치를 환산하기 어려운 문화재들도 여러 점 빼앗겼다"고 밝혔다.

    러시아군은 크림반도와 마리우폴 사이에 있는 멜리토폴에서도 문화재를 대거 탈취했다. 이반 페도로 멜리토폴 시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러시아가 멜리토폴 지역사 박물관에서 최소 198개의 문화재를 훔쳐갔다"며 "진귀한 소장품을 비밀 장소에 숨겨 보관해왔지만, 러시아군이 이를 억지로 찾아내 귀한 것들만 골라 가져갔다"고 밝혔다.

    이 중에는 우크라이나의 보물급 문화재인 기원전 4세기경 스키타이인의 황금 장신구가 포함됐다고 박물관 측은 밝혔다. 스키타이인은 기원전 8~2세기에 걸쳐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카자흐스탄 일대를 지배했던 유목 민족이다. 황금을 숭상해 금으로 만든 많은 장신구를 남겼고, 이 중 일부가 고대 신라의 것들과 유사해 신라 왕족의 '스키타이 기원설'을 낳았다.

    반출된 예술품은 동부 돈바스의 친러 반군 지역으로 옮겨지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문화재 약탈은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역사를 러시아의 일부로 보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문화재 강탈이 아닌, 우크라이나에 뺏긴 러시아 문화재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멜리토폴 지역사 박물관의 새 관장으로 임명한 이브게니 골라체우는 최근 러시아 국영 TV에 출연, "스키타이 황금 유물은 옛 소련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가치가 큰 것"이라며 "'특별 군사작전' 덕분에 시민의 품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고유 문화 유산에 대한 광범위한 파괴 행위도 저지르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립대 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전쟁 발발 이후 만 2개월간 우크라이나 내 주요 문화유산 191개가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완파 혹은 일부 파괴된 것으로 나타났다. 박물관 측은 "수백 년 이상 된 성당과 교회, 사원 58개, 111개의 유적지, 9개의 공공 기념물 등이 공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고고학자 올렉산드르 시모넨코는 "러시아의 이러한 행위는 우크라이나인의 삶과 자연, 문화, 산업 등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범죄 행위"라고 말했다.

    1954년 유네스코 주도로 체결된 '헤이그 협약'은 문화유산에 대한 공격과 약탈 등을 금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사법기관을 통해 국제 형사 소송을 개시하고,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를 통해 러시아에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입장이다.

    영국 가디언지는 "가해자가 실제로 처벌된 사례는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민간인 학살과 비교해 문화유산에 대한 폭력이 가벼워 보일 수 있으나, 위협적인 큰 나라의 그늘에 있는 나라엔 고유의 문화유산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기고자 : 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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