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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事一言] 西村 최고의 보석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발행일 : 2022.04.07 / 문화 A1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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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근처 보육 시설에 맡기느라 인왕산 자락에서 살기 시작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도심 속 시골 같던 이 동네가 언제부터인가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서울의 '핫플'(명소)이 됐다. 관광객은 "옛날 동네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네" 하며 감탄하지만 사실 여기만큼 변화무상한 동네도 없다. 막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수성동 계곡 올라가는 길에는 정육점, 전파상, 수퍼마켓, 철물점 같은 이런저런 가게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커피숍, 음식점이 하나둘 골목을 잠식했고 이제 업종은 그대로되 간판만 바꿔 달고 있다.

    동네를 다녀간 지인들은 한결같이 "거기 살면 참 좋겠어. 동네도 예쁘고, 아기자기한 가게도 많고" 하지만 주민으로서는 딱히 좋을 일도 없다. 오히려 생활은 더 불편해졌다고나 할까. 맞벌이 집 아이들의 하굣길을 살펴줬던 분식집이 사라지자 걱정이 늘었고, 귀가 시간에 맞춰 한밤중에 옷가지를 배달해 주던 길모퉁이 단골 세탁소가 문을 닫던 날에는 작은 케이크를 들고 가 섭섭한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어쨌든 관광지가 돼버린 이 마을에도 오랜 세월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 가게가 있다. 그 가운데서 내가 꼽는 최고 가게는 약국이다. 낡은 약장과 켜켜이 쌓여 있는 약들, 뒤죽박죽인 듯해도 그 나름대로 혼돈 속 질서가 있어 주문한 약은 바로 찾아 주신다. 이곳에서는 밤 9시가 넘어서도 약을 살 수 있다. 역병의 시대 이후로는 이 골목에서 편의점 다음으로 가장 늦게까지 불 켜진 집이 아닐까 싶다. 약국이 하는 일은 이뿐만 아니다. 낮에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벗이 되어 드링크제 한 병에 아픈 곳부터 가족 대소사, 연속극까지 일상 다반사를 상담하며 더러는 주변 출타한 이웃의 우편물을 대신 받아주기도 한다.

    오래된 동네의 매력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네라는 가치에서 본다면 약국이야말로 서촌의 보석이다. 노포(老鋪)가 어찌 식당이나 술집뿐이랴. '팬시' 서촌이 아닌 '동네' 서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남은 공간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기고자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015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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