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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대통령은 을(乙) 중의 을이다"

    황대진 정치부 차장

    발행일 : 2022.04.05 / 여론/독자 A35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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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저는 국민의 머슴"이란 말을 자주 한다. 선거운동 때만이 아니다. 4일 인수위 회의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으면 5년 전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가 떠오른다. 당시 청와대 요직에 들어간 인사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 와보니까, 웬만해선 바보가 되기 어렵겠더라." 청와대에는 매일 아침 대한민국의 중요 정보가 모인다. 밤사이 북한 특이 동향부터 국제사회 이슈, 여야 정치권 움직임, 각종 국내외 경제 지표와 기업 동향까지 보고된다. 각 기관에서 올리는 보고서는 현안에 시사점, 대응 방안까지 정리돼 있다. 그는 "매일 이렇게 보고를 받다 보면 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람도 똑똑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세상이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에서 전에 없던 거리감이 느껴졌다.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면 오만의 시작이다. 얼마 후 공공기관 인사가 시작됐다. 이른바 '캠코더' 출신 낙하산이 줄줄이 떨어졌다. 다시 만난 그는 "비판은 감수하겠다"며 "같은 낙하산이라도 우리 쪽이 전 정부에 비해 능력과 도덕성 면에서 더 나을 것"이라고 했다.

    모르는 게 없는데 뭐든 할 수 있는 힘까지 갖추면 독선이 시작된다. 5년 정권의 눈으로 세상을 재단(裁斷)하고, 5년 정권이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을 건드린다. 문재인 정부는 시장마저 꺾으려 했다. "부동산만큼은 자신 있다"며 20여 차례 대책을 내놨지만 모두 실패했다. 국가 에너지 정책의 대계도 흔들었다. 한전의 부실만 남기고 탈원전 실패를 자인했다. 아무도 모르게 울산시장 선거에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들통나고 있다.

    어느 정권이든 정보와 권력의 청와대 집중은 피하기 어렵다. '제왕적 대통령제'로 불리는 우리 헌법에선 더 그렇다. 그래서 정보와 권력을 다루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다. 정권의 성패(成敗)를 가르는 지점이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조각(組閣) 못지않게 대통령 비서실 인선이 중요하다. 새 대통령 참모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임태희 전 의원에게 들었다. 임 전 의원은 "대통령은 전체 국민 중에 을(乙) 중의 을이다. 거기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비서들은 '수퍼을'이 돼야 한다. 윤 당선인의 '머슴론'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보통 사람에게 청와대는 갑 중의 갑이다. 정권 초일수록 더 그렇다.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은 물론 기업도 벌벌 떤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같은 일이 그래서 터진다. 권력을 나누기는 어렵고 자제하기는 더 힘들다. 임 전 의원은 "청와대 비서실이 상전이 되면 그 짐은 다 을인 대통령에게 돌아간다"며 참모들에게 '보이스리스(voiceless)', '페이스리스(faceless)'를 주문했다. 참모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얼굴을 돋보이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른바 '윤핵관'들이 염두에 뒀으면 한다.

    윤 당선인이 제주 4·3 추념식에서 유족들에게 90도로 절을 한 장면은 인상적이다. 5년 뒤에도 국민이 이런 장면을 보고 '대통령이 진심이다'라고 느낀다면 성공한 정권이다. 윤 당선인은 아예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과 그의 비서실을 총칭해 뭐라고 부를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대통령 집무실이 어디든, 뭐라고 부르든 권력의 주적(主敵)은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오만을 이기는 권력을 보고 싶다.
    기고자 : 황대진 정치부 차장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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