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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층, 107층, 86층, 70층. 그냥 숫자 놀음이 아니라 2010년을 전후하여 부산에 들어설 고층 빌딩들이다. 단순히 높기만 한 것이 아니라 111층의 센텀시티 월드 비즈니스센터는 부산의 산, 바다, 하늘을 형상화하여 삼발이의 모양으로 세워지고, 70층의 수영만 우동 프로젝트는 동백꽃과 돛단배 등의 곡선을 형상화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가히 세계적이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에 걸맞은 건축물이고, 두바이의 버즈 알 아랍에 못지않은 하드웨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서비스산업의 허브로 기능하는 두바이와는 달리 부산은 고층 건물이라는 하드웨어를 채울 산업 역량이 없다. 구도심의 107층과 동부산의 111층 건물이 동시에 완공될 경우 과연 이 건물에 입주할 산업과 인력 수요가 있는지, 알 만한 사람은 지금부터 전전긍긍이다.

“도대체 지난 4년 동안 뭐 했습니까?” 최근에 만난 부산의 한 기업인은 이렇게 말했다. 생산 공장을 중국으로 옮긴 그 기업인은 기업할 수 있는 여건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한나라당 일색의 ‘부산’ 정치인들에게 한 맺힌 듯 열변을 토한다. 자신의 기업 이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 양 껍데기만 남아가는 부산의 경제 현실에 가슴이 쓰리다. 그래서 아파트와 오피스로 사용될 저런 마천루 경쟁이 종래 못마땅하단다. 당연하다. 그래서 지금 부산에 필요한 것은 고층 빌딩 경쟁이 아니라 사람을 불러 모으고, 돈을 불러 모으고, 정보를 불러 모을 산업과 기업을 어떻게 해서든 부산으로 끌어오는 일이다.

같은 질문을 그대로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할 수 있다. “도대체 지난 4년 동안 뭐 했습니까?” 주가가 2배로 오르고 아파트값이 폭등한 것을 경제 성적표로 내세울 것인가? ‘아파트값’ 말고는 자신 있다고 하는 한국호 선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것인가? 서울서 만난 기업인들은 냉소적으로 말한다. “어림도 없다.” 그 기업인들이 하는 말의 골자는 “앞으로 먹고살 길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는 것이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라는 진부한 표현은 이제 그만 사용하자. 그 기업인은 말한다. “일본과 중국, 특히 중국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가? 지금 우리가 세계 제일이라고 뻐기는 조선업도 조만간 중국에 추월당한다. 다른 산업은 이미 추월당하고 있다. OECD 가입국. 1인당 소득 2만달러. 우습지도 않다. 이대로 가면 우린 다 망한다.”

거리를 두면 사물의 본질이 더 선명히 드러난다. 수렁에 허덕이는 부산 경제를 보는 안타까움은 지지부진한 한국 경제를 보는 안타까움의 복사판이다. 부산의 인구와 경제력은 날로 쇠퇴하여 부산은 이제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는 명칭을 양보해야 할지 모른다. 산업정책연구원(IPS)은 올해 중국의 국가경쟁력(21위)이 처음으로 한국(23위)을 추월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 출장길에서 한국 경제를 생각할 때 느끼는 그 쓸쓸함은 서울에서 부산을 생각할 때의 그 처량함과 정말 흡사하다.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그 잠재력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까지. 그리고 문제 해결의 방향을 산업과 기업의 활성화가 아니라 외형적인 과시에서 찾는다는 것까지 어쩌면 그 둘은 그리 비슷한가.

“헤이, 이봐 문제는 경제야!” 1992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각광을 받은 민주당 클린턴 후보의 선거 구호다. 한국의 대선이라고 그런 쟁점이 다를 리 있겠는가. 하지만 한국호의 선장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문제의 핵심인 기업과 산업에는 관심도 없이 오늘은 ‘비노(非盧) 아니면 반노(反盧)’, 내일은 ‘경선 룰’로 세월을 보내니 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김기홍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 기고자 : 김기홍
장르 : 고정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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