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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2009년 상반기에 5만원권과 10만원권 등 고액권을 발행하겠다고 밝히면서 새 지폐에 들어갈 인물 선정을 놓고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다.

오늘날 화폐는 단순한 물물교환 수단을 넘어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최대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고, 또 사람들에게 하나의 역할 모델이 되도록 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화폐 인물은 1000원권에 퇴계 이황, 5000원권에 율곡 이이, 1만원권에 세종대왕 등 남자만 들어가 있다. 하지만 세계의 여러 나라에선 여성들도 단골로 화폐에 얼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은 2004년에 발행한 5000엔 신권에 메이지시대 소설가이자 시인인 히구치 이치요가 올랐고, 영국 화폐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새겨져 있다. 또한 유로화로 통일되기 이전 독일 500마르크짜리 지폐에는 과학자인 메리안이, 프랑스의 500프랑짜리에는 퀴리 부인이, 이탈리아의 1000리라짜리에는 몬테소리가 각각 새겨져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도 여성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신권 화폐에는 반드시 여성을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신사임당과 유관순, 김만덕 등이 오르내린다. 신사임당과 유관순은 아이들도 알 정도로 이름난 인물이지만 김만덕은 누구일까.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영·정조시대 여성 경제인(CEO)이자 자선사업가이다. 원래 그녀는 제주의 양갓집 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관기(官妓)가 됐다. 하지만 스무 살 무렵 관기생활을 청산한 뒤 포구 근처에 객주(客主)를 차리고 해상 유통업에 뛰어들어 거상(巨商)이 됐다. 정조 16년(1795) 이래로 제주에 큰 기근이 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만덕은 그때까지 모은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곡식을 사들여 수천명의 목숨을 구하였다. 정조는 그 보답으로 만덕에게 소원을 물어 역마를 타고 한양에 올라와 왕과 왕비를 알현하고 금강산까지 구경하도록 해주었다.

이후 그녀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정승 채제공을 비롯해서 당대의 문장가인 이가환, 박제가, 정약용 등이 그녀에 관한 기록을 남겼으며 사후에는 추사 김정희가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까지 써주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당시 ‘존경받는 여성 CEO’였던 것이다.

만덕은 요즘처럼 빈익빈 부익부, 곧 자본주의가 뒤틀려 가는 시대에 더욱 부각될 만하다. 벌써 200여년 전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와 함께 사는 세상의 소중함을 실천한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만덕은 한국 여성사를 대표하기에 충분한 인물이자 청소년들에게 역할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번 신권 화폐에 여성 인물을 넣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드높아가는 여성들의 위상을 고려할 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특히 만덕은 경제인으로서 사람을 살리는 데 돈을 쓰는, 곧 돈의 참된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위인이었기에, 고액권 화폐의 여성 인물로 선정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정창권 고려대 국문과 초빙교수 기고자 : 정창권
장르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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