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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중국 부유층 네 커플이 유럽 여행을 떠났다. 이미 한 커플에게 4300만달러(약 524억원)짜리 전용 제트기 걸프스트림 G500이 있었지만 네 대를 더 빌렸다. 파리에선 하루 저녁에 마신 와인이 10만달러(약 1억2000만원)어치였고, 여행 도중 1억달러(약 1200억원)짜리 가격표에 누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돌아올 땐 유혈 스포츠 같은 광란의 쇼핑을 한 결과 공항에서 부가가치세 환급 절차에 3시간이나 걸렸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자칭린(賈慶林)의 사위 리보탄(李伯潭),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恒大) 그룹의 회장 쉬자인(許家印) 등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이뤄진 이후 공산당 고위 간부와 그 가족은 각종 이권 사업에 쉽게 개입하고 신흥 기업가들과 유착 관계를 맺었으며 갑자기 벌어들인 엄청난 돈으로 온갖 사치를 누렸다. 책 제목 '레드 룰렛'은 이들의 축재가 마치 도박판 같았다는 의미다.

이 여행을 주최한 사람은 이 책의 저자 선둥(沈棟·데즈먼드 슘)과 돤웨이훙(段偉紅·휘트니 단) 부부였다. 돤웨이훙은 원자바오(溫家寶) 당시 중국 총리의 아내 장페이리(張培莉)가 수양딸처럼 여긴 사업가였다. 상하이 출신인 선둥은 어린 시절 홍콩으로 이주해 자란 미국 유학파였으며, 중국 내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돤웨이훙과 결혼한다. 이들은 중국의 경제 부흥기를 올라타고 주식 투자에 성공하는가 하면 베이징 국제공항에 세계 최대 규모의 물류 센터를 세우며 수십억 달러의 부(富)를 일군다.

이 책은 돤과 이혼하고 중국을 떠난 선이 2017년 '당신 전처가 중국에서 실종됐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는 데서 시작한다. 이미 이혼으로 많은 재산을 잃은 선은 '이제서야 중국의 실체를 확실히 깨달았다'며 이 책을 썼다.

본인이 부정부패 커넥션의 한가운데 있었으면서 관찰자 행세를 하는 모습이 불편할 수 있지만,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타임스가 '2021년의 책'으로 선정한 이 책은 CNN이 "당신이 읽지 않기를, 중국은 바란다"고 했을 정도로 중국 공산당의 부패와 탐욕, 권력투쟁의 민낯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책 출간을 앞두고 중국 정부는 구금했던 선의 전처 돤을 잠시 풀어주고 선에게 전화를 걸게 해 '그 책을 내면 결말이 좋지 않을 것'이라 협박했다고 한다.

선은 중국 사업에서 성공하는 열쇠는 유대 관계를 뜻하는 '꽌시(關係)'였다고 말한다. 공산당 가족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수익을 보장하며 인맥을 쌓고, 다시 권력자를 등에 업은 뒤 청탁을 통해 이권을 보장 받는 능력이 필요했다. 대표적인 '꽌시'는 원자바오의 아내 장페이리를 '이모'로 떠받드는 일이었다. 악어의 이빨을 청소하는 물고기 노릇을 하면서 장페이리 자신도 미처 몰랐던 욕망을 부추겼다. 훗날 수십 배 오를 보험사 지분의 2%를 장페이리, 1%를 선 부부가 갖고 돤의 회사 명의로 보유하기로 하는 식이었다. 선은 "모든 승인은 연줄이 있어야만 가능했는데, 그것은 더 많은 마오타이주를 바쳐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고 털어놓는다.

왜 시진핑(習近平)이 최고 권력자가 됐는가에 대한 비화도 나온다. 혁명 원로들이 "우리 자녀가 권력을 승계하면 최소한 우리 무덤을 파진 않을 것"이라며 가문에서 한 명씩 후계자를 뽑았는데 그중 시진핑과 보시라이(薄熙來)가 돋보였다. 2012년 보시라이의 아내가 살인 사건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자 시진핑은 "관련자를 모두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해 보시라이를 낙마시켰다. 선 부부가 인맥을 통해 '왜 시진핑이 차기 권력자로 선택됐는가' 알아봤더니 "그다지 특별한 재능이 없는 인물이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독재를 할 것 같지 않다는 얘기였다.

오판이었다. 시진핑은 2013년 국가주석 자리에 오른 뒤 1인 체제를 구축했고, 중국 공산당은 개혁·개방을 거꾸로 되돌리는 본색을 드러냈다고 저자는 말한다. 국고가 충분히 채워지자 중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나아가리라는 기대는 물거품이 됐으며 한때 경제 발전의 주역이었던 많은 사업가들은 토사구팽됐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아내 돤이 중국 당국에 구금된 뒤 남편 선은 이렇게 말한다. "패자를 가차 없이 공격하는 특성은 공산주의 체제의 본질적 기능이다. (중국 공산당은) 세상을 적과 동맹으로 나눴고, 동맹이라는 것도 일시적이고 소모적이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지금 이런 나라 옆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