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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대청소와 함께 다시 '책장의 위기'가 시작된다. 언젠가부터 제때 공부를 못했다는 생각에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도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 서재에 책가도(冊架圖·책과 도자기 등이 서가 안에 놓인 모습을 그린 그림) 병풍을 두고 마음을 달랬다니 그 처방이 그다지 틀리지는 않았던 듯싶다. 그러나 독서의 속도는 쇼핑의 속도를 이길 수 없는 법. 그래서 다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 집안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책이 느는 만큼 집안도 넓힐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까닭에 요 몇 년 전부터는 버리지 않고서는 살 수도 없게 됐다. 한때 공부하는 게 보기 좋다던 가족도 이제 책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가 됐으니 이삿짐센터 직원이야 더 말할 나위 있을까. 경주 근무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이사할 때는 꽤 많은 책을 버렸다. 오죽하면 동네에서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조차 "아이고, 이렇게 다 버리면 공부는 어떻게 하려고"라며 걱정해 줬다. 살짝 기뻐하는 모습도 감추지는 못하셨지만.

책을 버리는 것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다. 주인의 눈에야 양서(良書) 아닌 것이 없으니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보낼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결국에는 오래된 것부터, 더는 안 읽을 것을 차례로 골라낸다. 그러나 이 모든 잣대를 무력화하는 일군(一群)이 있으니 바로 선물로 받은 책들이다. '라떼' 같은 이야기일는지 모르겠으나 학교 다닐 때 '선물' 하면 책이었다. 입학했다고, 생일이라고, 또 기념이라며 표지 안쪽에 글 한 줄을 보태 선물로 주고받았다. 새 학기 선물로 받은 '트로츠키 평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선물하고 보답으로 받은 '한비자(韓非子)', 감성이 메말랐다며 받은 장 그르니에의 '섬' 등등, 가히 책꽂이의 불천위(不遷位·사당에서 옮기지 않는 신위) 한 칸이다.

박물관의 옛 책 가운데는 내사본(內賜本)으로 분류되는 것이 있다. 조선시대 임금이 하사한 책을 말한다. 임금의 선물이었기에 책 자체도 좋지만 다들 소중하게 간직해서 보존 상태도 좋다. 임금으로부터 받은 책은 아니지만 마치 내사본처럼 돼 버린 책들을 하나둘씩 펼치며 다시 봄을 맞는다. 기고자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073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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