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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치밀한 전략가다. 노회(老獪)하고 암수(暗數)에 능하며 마키아벨리적 권력정치에 정통한 인물인 것이다. 수백만 인민이 굶어 죽어도 눈 한 번 깜짝 안 하는 냉혈한이기도 하다. 김정일의 이런 '능력'은 북한 인민의 '비극'이었지만, 총체적으로 실패한 체제를 버텨내는 기반으로 작동한다.

요새 북한은 엄중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1월 13일 외무성 담화, 1월 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 1월 23일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 면담 시 김정일 발언, 1월 30일 조평통 성명, 2월 1일 노동신문 사설로 이어지는 '수사(修辭)의 정치'가 숨 가쁠 정도다. '조선반도 정세의 긴장상태를 원치 않는다'면서도, '군사적 충돌과 전쟁, 그리고 종국적 파멸'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잘 조율된 북한판 말의 정치는 일수사타(一手四打)를 겨냥한다. 오바마 정부에 신호를 보내고, 흔들리는 내부를 다잡으며, 이명박 정부에 경고하고, 남한 사회를 분열시키려는 것이다. 김정일의 시도가 성공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남북이 생사의 주도권을 다툰 한반도 현대사의 경주(競走)가 한 '종말의 시작'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다. 핵게임을 둘러싼 김정일의 전략적 목표도 분명해졌다.

북 외무성 담화문은 북핵 폐기보다 미·북 관계 정상화가 우선이며 이후 핵군축 협상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미국과 대등하게 양자 간 핵군축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과 핵위협의 근원적 청산이 없이는 100년이 가도 우리가 핵무기를 먼저 내놓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적대관계를 그대로 두고 핵문제를 풀려면 모든 핵보유국들이 모여 앉아 동시에 핵군축을 실현하는 길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지구상의 핵보유국들이 동시 핵군축을 실행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므로 북의 강조점이 앞 문장에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미국의 대북적대정책과 핵위협이 근원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한 핵포기는 없다는 것이다.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김정일 발언은 결국 핵보유국 지위 획득과 미·북 수교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자는 것이다. 나아가 북은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조선반도 평화체제' 수립 필요성을 강변하리라 예측된다.

김정일의 이런 전략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미국 내부사정이 워낙 다급해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미·북 교섭에서 북핵 치킨게임은 지루하게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협박도 한국이 '친절한 무시'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흔들리는 북한체제에 대한 내부 단속도 이미 '자력갱생'에 눈뜬 주민들 때문에 쉽지 않을 터이다. 김정일식 말의 정치가 그나마 가장 효과를 보일 부분은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국 시민사회의 분열일 것이다.

권력관리나 대외교섭에서 김정일은 놀랄 만한 적응능력과 생존력을 과시하였다. 따라서 그는 '현대 동북아의 마키아벨리'라 할 만하다. 그러나 권력투쟁의 비열함과 야만성이 불가피하다고 본 마키아벨리도 권력싸움의 궁극적 정당성을 전체 인민의 안녕에서 찾았다. 바로 이 점에서 김정일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적 허구가 울고 갈 신권(神權) 군주적 병영국가를 완성한 대가는 폐허가 된 북녘 강토와 유령처럼 헐벗은 인민들이다.

북한의 일과 말들은 김정일의 '수표(手票·사인)' 없이 시행되지 않는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을 제도화한 워커홀릭(일중독자)인 그는 전에 알코홀릭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보살피는 '지도자 동무'는 항상 과로에 시달린다. 뇌졸중에서 극적으로 회생한 김정일은 '한방의 역전'을 노리지만 시간은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 역사를 유린한 자는 역사의 복수를 당하기 마련이다. 감히 추측건대 '김정일 이후'의 시대는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것이다.

윤평중 한신대 사회철학 교수 기고자 : 윤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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