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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시기가 문제다. 2023년 12월 31일, 북한은 남북이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김정은표 '적대적 두 국가론'이다. '통일'은 입에도 올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새 정부가 1969년 이래 반세기가 넘은 통일부 이름을 갑자기 바꾸겠다니, '제2의 김여정 하명법'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미 전주곡이 있었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평화적 두 국가론'이다. 김정은 버전과 형용사는 다른데, "통일하지 맙시다"는 같다. 작년 9월 19일, 임 전 실장은 '9·19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연설 일성으로 "통일, 하지 맙시다"를 선언했다. "통일을 버리고 평화를 선택하자"는 것이었다. 이유는 크게 4가지다. 통일 논의가 "상대에 대한 공격"이고 "비현실적"이며, "통일이 무조건 좋다는 보장도 없"고, "남북 모두에게 거부감이 높다"는 것이다. 또 통일 강박관념만 버리면 좋은 게 생긴다. "그냥 따로 함께 살면서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돕고 같이 행복"해질 수 있고, 경제 지평을 동아시아로 넓히고, "한반도 비핵화 방안"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니 "국가보안법도 폐지하고 통일부도 정리"하자고 촉구했다. 정동영 후보자의 예고편이었다.
임 전 실장은 전대협 의장 출신이다. 평생 통일을 인생의 목표로 공언한 사람이다. 김정은을 비판하는 게 당연한데, 그 반대였다. 통일이 그토록 비현실적이라는 현타는 왜 갑자기 왔는가? 왜 돌연 통일이 그렇게 나쁜 것이 됐나? 연설에는 그런 설명이 없다. 친북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사무처장으로 10년간 활동했던 민경우씨는, 임 전 실장이 "북한이라는 족쇄를 끊지 못했"다고 본다.
이런 까닭에 통일부 이름을 바꾸거나, 통일보다 평화가 먼저라면 의혹이 앞선다. 우리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더불어민주당은 '자유'를 삭제하고 '민주적 기본 질서'로 수정하는 개헌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물론 4시간 뒤 취소했다. 그해 5월 민주노총 노동절대회 선전물도 "자본주의적 흡수통일 내지는 무력통일을 하려는 시도로 북측이 오해하여, 헌법의 평화통일 원칙에 위배"될 수 있으므로 '자유'를 빼자고 주장했다. 이 평화는 헌법과 자유 위에 있는가?
한국 주사파에게 "김일성과 북한은 어떠한 난관과 시련에도 변치 않는 조국 통일의 상징"이었다. 북한 헌법 서문도 김일성과 김정일이 조국 통일에 '불멸의 업적'을 쌓았고 "통일을 민족 지상 과업"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통일은 또한 백범 김구 이래 한국 민족주의의 최고 대의였다. 이들은 보수 진영을 외세의 앞잡이, 분단 세력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적대적 두 국가론' 때문에 진보 진영의 사상과 도덕적 우위가 무너졌다. 이후의 '평화' 담론이란 그 허물어진 담장을 재건하려는 안간힘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오직 평화만 외치고 통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는 "통일보다 사이좋은 이웃이 되자"고 했다. 하지만 '적대적 두 국가론'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궁여지책인 '평화적 두 국가론'은 사실 문재인 평화론의 파산 선언이었다. 남북 대화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게 임 전 실장의 가장 큰 통찰이었다. 물론 왜 그런지는 말하지 않았다.
북한이 남북 대화와 통일을 두려워하는 건 체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적대적 두 국가론' 이후의 평화주의는 오염된 평화주의다. 결과적으로 통일이라는 민족의 대의를 저버린 북한 논리를 따르고 있다. 맹목적 평화주의로 우리 군은 주적 개념도 상실했다. 탈북민이 북송되고, 서해상에서 우리 국민이 불태워져도 방치됐다.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단 낫다"는 비루하고 나약한 안보관이 국민 의식을 좀먹고 있다. 이런 평화주의로는 통일은커녕 평화도 지킬 수 없다. 기고자 : 김영수 영남대 교수·정치학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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