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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할 때마다 꼭 챙기는 작은 상자가 있다. 편지 50여 통을 넣은 것이다. 주소가 다 우체국 사서함이다. 청송 진보우체국, 포항 흥해우체국, 전주우체국, 안양우체국, 춘천우체국…. 우체국 사서함 몇 호가 주소다. 교도소 수용자들과 주고받는 편지인데 내 편지를 그들은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주소가 우체국 사서함이라 처음엔 신기했다.

3개월이건 2개월이건 내게 주어진 시(詩) 창작 프로그램 마지막 시간이 되면 꼭 하는 말이 있다. 여러분은 이제 저와 헤어지지만 시를 계속 쓰면 좋겠습니다. 시가 두세 편이건 너덧 편이건 쓰이면 제 주소로 보내주세요.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지도를 해 드릴 테니까 시를 계속 쓰기 바랍니다. 아셨죠?

그들은 내 학교 주소를 받아 적었고 서운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매주 몇 달을 봤으니 정이 들어 헤어지기가 참 섭섭했다. 수업 시간 자체가 웃고 울고, 얘기꽃이 피어나고 박수가 터져 나오고…. 정이 들 대로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아버지, 자식에 대해 시를 써보라고 하면 대개 짧은 수필을 썼기에 더 재미있었다. 어머니에게 불효했던 일, 아버지하고 어디 갔던 추억, 자식 덕분에 기뻤던 일, 아내한테 미안했던 것 등등 평소에는 말하지 못했던 집안의 비사를 쓰는데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희한한 장르의 글을 썼다.

자작시를 읽게 하면 끝까지 못 읽는 경우가 많았다. 돌아가신 아버지, 편찮으신 어머니, 나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 범죄자의 아들이 돼버린 자식… 이번에 수능 시험을 쳐야 하는데 내가 이 꼴이라서… 아내의 손이 마를 날이 없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애는 아빠가 원양어선 탄 줄 아는데…. 11년 동안 정말 온갖 사연을 다 접했다.

시를 열심히 썼던 이들이 편지를 보내 오는데, 시일이 지나면 중단되었다. 시 쓸 여건이 안 되니까 편지에 할 말도 없어지고 그만 펜팔이 중단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 시를 써본 경험, 자기가 쓴 시를 읽다 통곡하는 바람에 동료가 읽어준 일, 강사의 칭찬을 들은 일, 이번 주의 장원작이라는 발표와 함께 우레 같은 박수를 받은 일은 오래 기억할 것이다. 기고자 : 이승하 시인·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774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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