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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안보회의 연설서 압박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 장관은 지난 31일(현지 시각) "인도·태평양 동맹들이 중국과 북한을 마주한 더 위협적인 상황에 있으면서 유럽보다 훨씬 적은 국방비를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인·태 동맹들도 신속히 방위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헤그세스 장관은 이날 싱가포르에서 개최 중인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 연설에서 "유럽이 점차 안보에 관한 책임을 더 지는 것처럼 아시아 동맹들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중국은 아시아를 지배하고 통제하려 한다. 지역 패권국이 되려 한다"면서 "많은 국가가 중국과 경제 협력, 미국과 국방 협력을 모두 추구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은 긴장 또는 갈등의 시기에 중국의 악의적 영향력을 심화시키고 결정 공간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했다. 한국 등 아시아 동맹들을 향해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지하는 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대중(對中) 압박 정책에 동참하라"는 미국의 요구 수위가 높아진 것으로, 한국 차기 정부의 최대 외교 현안이 될 전망이다.

◇중국 침략 억제로 방향 재설정

헤그세스 장관은 이날 연설 내내 중국의 위협과 이에 맞서기 위한 우방 간 연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은 인·태 지역에 머무르기 위해 왔다. 많은 게 걸려 있어 떠날 수 없다"면서 "우린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의 침략을 저지하는 쪽으로 전략 방향을 재설정하고 있다"고 했다. 미 안보 전략의 초점이 '대중 억제'에 맞춰지고 있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이다.

그는 "중국의 위협은 실제적이고 즉각적"이라며 "중국은 막대한 군사력 증강, 무력 사용 의지로 지역의 현재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한다"고 했다. 이어 "중국의 행동은 주변국과 전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매우 긴급한 신호"라고 했다. 또 "중국이 남중국해에서도 이웃 국가들을 괴롭히고 있다"며 물대포 공격, 선박 충돌, 불법 점거·군사화를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행동은 중국이 주변국을 존중하지 않고 주권과 항행 자유에 도전한다는 걸 보여준다"며 "이들의 어떠한 일방적, 강압적 현상 변경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시진핑 주석이 2027년까지 대만 침공을 감행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라고 명령했다는 건 이미 공개된 사실"이라며 "중국군은 매일 훈련하며 실제 상황에 대비한 리허설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대만 정복 시도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중국의 위협은 현실이고, 임박했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동맹이 중국에 종속되는 걸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GDP 5%까지 국방비 올려라"

그는 "동맹국들이 자기 역할을 다하기를 요구한다"면서 "아시아 동맹들은 유럽을 새로운 사례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일 등 나토 회원국은 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며 구체적 숫자를 언급했다. 사실상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동맹에도 같은 수준으로 국방비를 인상할 것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됐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 국방비는 지난 5년간 GDP의 2.5%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외교 소식통은 "차기 정부는 출범 초부터 트럼프 행정부에서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과 함께 국방비 확대 요구를 받을 것"이라면서 "국방·외교부뿐 아니라 기획재정부 등 범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나토 회원국들에도 국방비 인상 압박을 하고 있다.

◇"안미경중 유혹 벗어나라"

헤그세스 장관은 "많은 국가가 중국과 경제 협력, 미국과 국방 협력을 모두 추구해야 한다는 유혹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은 긴장 또는 갈등의 시기에 중국의 악의적 영향력(malign influence)을 심화시키고 결정 공간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했다.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은 "미 국방장관이 우방들에 대중 경제 협력과 관련해 우려를 표명한 것은 이례적"이라면서 "한국 등 '안미경중' 전략을 펴는 동맹국에 일부 경제적 손해가 있더라도 대중 압박전에 동참하라고 요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최근 미국의 대중 견제 정책이 강화되자,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 완화, 한국 관광객 무비자 제도 등 각종 유화책을 내놓고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현재 미국에 경제는 안보와 동일 선상에 있다"면서 "과거처럼 안보와 경제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인·태 지역 MD 강화 예고

헤그세스 장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조달러(약 1384조원)가 넘는 국방 예산안을 제시했다"면서 "이에 따라 차세대 미사일 방어망 '골든돔'과 6세대 전투기 F47 개발 등이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인·태 지역의 미사일 방어 개선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면서 지역 통합 방공 및 미사일 방어 구조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골든돔은 트럼프가 지난달 20일 발표한 미국 본토 방어용 통합 미사일 방어 체계로, 기존 지상 미사일 요격 시스템인 패트리엇·사드(THAAD) 체계 등에 더해 우주 기반 센서, 인공지능(AI) 지휘 체계, 요격체 등을 포함한 다층적 방어망이다.

헤그세스 장관이 골든돔 등 차세대 방공망 구축 사업을 지역 동맹과 함께할 의사를 밝히면서 향후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동맹의 참여를 요청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미국이 한국도 참여하는 동북아 방공망 구축에 나설 경우 중국이 반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앞서 중국은 2017년 성주에 사드를 배치하자 강하게 반발하며 중국 내 한국 기업에 보복성 조치를 가하고 한한령을 내렸다. 이에 그해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사드 추가 배치' '미 미사일 방어 참여' '한·미·일 군사 동맹' 등 세 가지를 하지 않겠다는 '3불(不)' 약속을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은 "트럼프의 대중 견제 전략은 전임 바이든 행정부 때부터 이어진 초당적 정책이기 때문에 미국의 동참 요구에 차기 정부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면 한미 동맹에 탈이 날 수 있다"면서 "미국 요구를 받아주면서도 우리의 국익도 챙길 수 있는 접점을 찾는 방향으로 협상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 안보회의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주관으로 미국·중국 등 주요 국가 안보 수장들이 모여 안보를 논의하는 아시아 지역 최대 다자 안보 회의. 2002년 처음 개최된 이래 매년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려 '샹그릴라 회의'라고도 불린다. 한국 국방부 장관도 매년 이 회의에 참석해 왔는데 올해는 국방 장관이 공석이고 6·3 대선 등 국내 정치 일정이 있어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이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그래픽] 한국 GDP 대비 국방비 현황 / 나토 주요국 GDP 대비 국방비(%) 기고자 : 노석조 기자 양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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