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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과일 재배 선구자
'제주 망고 아버지' 박찬수

올해도 '애망빙(애플망고 빙수)'의 계절이 돌아왔다. 특급 호텔들이 5월에 들어 일제히 애플망고 빙수 판매에 나섰다. 애망빙은 2008년 제주신라호텔이 지역 식재료 발굴 차원에서 처음 선보였다. 출시 당시 2만7000원이던 애망빙은 가격이 급상승해 올해 무려 14만9000원을 받는 호텔도 나왔다. 인기가 사그라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스몰 럭셔리'이자 여름 별미로 자리 잡았다.

애망빙은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박찬수(75) 카세로지 대표. 국내 최초로 제주도에서 망고 대량생산에 성공한 사람이다. 애플망고만이 아니다. 바나나를 비롯 리치·구아바·파파야 상품화를 성공시키며 제주도에 열대 과일 재배 열풍을 몰아왔다.

그가 제주 출신이라 짐작하겠지만 틀렸다. 집안 대대로 서울 사대문 안에서 살아온 토박이. 공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전자회사에서 카세트 플레이어 등을 개발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제주에서 재배할 열대 과일을 찾아 세계를 누비던 그는 제주 같은 풍광을 가진 곳이 드물다는 걸 깨닫고, 그 풍광을 만끽하며 제대로 쉴 호텔을 만들고 있다.

제주살이 꿈 이룬 서울 공학도

―서울 토박이 맞나요.

"요즘 서촌이라 부르는 종로구 옥인동에서 태어나 청운동에서 자랐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제주에 끌렸다고요.

"우리 집 텃밭이 꽤 컸어요. 화단 만들고, 꽃이나 채소를 심고 가꾸는 걸 좋아했지요. 자연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제주를 설명하는데 '제주도에는 한라산이 있어 해발고도에 따라서 열대부터 한대까지 각각 다른 식물들이 자란다'고 해요. 거기에 꽂혔죠. '가 봤으면' '살아 봤으면' 싶더라고요. 제주도 지도를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내가 갈 곳'이라고 써 놓았죠."

―사모님도 제주 분이라 마음에 드셨나요.

"얼굴도 예뻤어요(웃음)."

―어려서부터 전자제품 만들고 뜯고 고치기를 좋아했다면서요.

"중·고교 때 청계천에서 부품을 사다가 전자제품을 조립했어요. 라디오는 하룻밤이면 만들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5만원 주고 전축을 만들어 달래요. 그럼 5000원 남아요. 제법 큰돈이었죠."

―고등학생 때 전파사를 차렸다고요?

"어느 날 동네에 전파사가 생겼어요. 간단해 보이는데 젊은 주인이 고치는 걸 힘들어하더라고. 1분도 안 돼 고쳐 줬더니 '학교 끝나면 와서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사고로 일찍 죽었어요. 아내가 '나는 운영을 못 하니 맡아달라'고 해 고민하다가 인수했죠."

―대입 시험이 코앞인데 혼내진 않던가요.

"어머니는 '학생이 무슨 짓이냐'며 난리셨죠. 아버지는 달랐어요. '작은 쥐를 해부해 구조를 알면 나중에 코끼리처럼 큰 동물도 수술할 수 있다. 그러니 작은 일이지만 철저히 해 보라'며 전파사 인수할 돈을 주셨어요. 엔지니어가 될 줄 아시고 미리 작은 규모로 해 보라며 허락하신 거죠."

그의 부친은 한국외국어대 영문과 교수를 지낸 고(故) 박규서 박사이다.

―전파사는 잘됐나요.

"학교 간 동안 가게를 맡긴 사람이 있었어요. 몰래 부품이나 배터리를 가져다 팔아먹었어요.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운영할 수도 없었고요. 돈은 돈대로 잃고 공부는 공부대로 못 했죠."

―졸업 후 당시 금성사(현 LG전자)보다 컸던 '천우사'에 입사했는데.

"시험을 잘 봤어요.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생산직으로 가고 저만 개발실로."

―개발과장으로 고속 승진했다고요.

"미국 바이어가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와서 '이렇게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 물어요. 직원들이 5~6개월 걸릴 거라고 해요. 저는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었어요. '5일 후'라더군요. 청계천에 달려가 각종 부품을 사서 집에도 가지 않고 닷새 만에 소리가 나오는 시제품을 만들어 보여줬어요. 바이어가 '납품 단가가 얼마냐?' 물어요. 일본 소니 제품이 40불(달러)이면 우리는 30불이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몇 만 대를 계약하고 갔어요. 사장이 준 보너스는 봉투째 아내한테 갖다 줬죠. 뜯어 보더니 '집 한 채 살 돈'이라며 놀라요. 그 돈으로 제주에 밀감밭을 샀지요."

―제주에 살겠다는 꿈을 이룬 거네요.

"일을 잘하니까 사표를 안 받아줬어요. 1999년 제주로 휴가 와서 회사로 전화했어요. '죽어도 안 돌아갑니다. 제주에 머물 겁니다.' 밤샘하며 납땜질하고 연기 맡다 보니 맨날 설사하고 신경성 대장염으로 배가 아팠거든요. 그런데 제주에서 농사지으며 살기도 쉽지 않더라고요."

열대 과일에서 찾은 돌파구

제주 밀감은 생산과잉이었다. 열대 과일로 관심을 돌렸다. 망고에 앞서 바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1981년 서귀포에 '수농원'을 세우고 바나나 재배를 시작했다. 당시 제주에서 바나나 대량 재배는 불가능하다고들 했다. 그는 1982년과 1983년 각각 바나나 6t 생산에 성공했다.

―왜 열대 과일이었나요.

"시설(하우스) 영농이라 생산량에 제한이 있습니다.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할 일도 없겠다 싶었죠."

―바나나를 고른 이유는.

"파인애플은 맛이 신통치 않아 경제성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봤어요. 바나나는 대량 재배만 가능하다면 히트하리란 확신이 섰지요."

―돈도 버셨습니까.

"땅과 시설에 투자한 돈이 2000만원인데, 첫 수확만 3000만원 나왔어요. 너도나도 '바나나 하겠다'며 찾아왔어요. 한때는 바나나로 밀감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릴 때가 있었죠."

―제주 바나나의 호황기는 얼마 가지 않았죠.

"바나나의 약점은 원산지 가격이 너무 싸다는 거예요. 언젠가 원산지 바나나가 수입되면 가격이 폭락하리라 예상했어요. 바나나를 대체하기 위해 1985년부터 망고, 파파야, 구아바, 리치 등 열대 과일 30여 종을 가져다 시험 재배했죠. 망고와 리치가 한국인 입에 맞더라고요. 리치는 재배가 까다로워요. 그래서 망고를 가장 적합한 품목으로 정하고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재배했습니다."

―망고도 품종이 수십 가지죠.

"국내 재배하는 애플망고는 본래 이름이 '어윈(Irwin) 망고'입니다. 애플망고라는 이름을 제가 붙였어요. 익으면 빨간빛을 띠는 게 사과 같아서요."

―애플망고를 선택한 이유는.

"당도가 높으면서도 새콤한 맛이 한국인 입에 가장 맞았어요. 인도 등에서 나오는 노란 망고 중에는 휘발유 비슷한 냄새가 나는 품종도 있는데, 한국인이 선호하지 않지요."

―애플망고도 바나나처럼 외국산에 밀려나지 않을까요.

"국산 애플망고의 새콤달콤한 맛은 일교차가 큰 우리나라라서 가능합니다. 일교차 없는 열대 지역에서 생산한 망고는 단맛만 있고 산미가 약해요. 야외에서 키우기 때문에 질긴 섬유질이 많아 식감도 떨어져요. 망고는 완전히 익은 뒤 수확해야 제맛이 나는 과일이라 저장성이 떨어지고 유통 기간이 짧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익지 않았을 때 따서 들여오는 동안 후숙시키는 바나나와는 다르죠. 게다가 해충 오염 지역으로 묶여 있어 국내 수입이 불가능한 동남아 국가가 많아요. 대량 수입되더라도 시차 재배로 수확·출하 시기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성이 있다고 봅니다."

―애플망고는 언제 제일 맛있나요.

"6월이 제일 맛있어요."

―망고 고르는 법을 알려주신다면.

"딱 보면 알죠. 반질반질하면서 사과처럼 빨갛게 잘 익은 색이 나와야 돼요. 퍼렇고 누르스름하고 빨간색이 적은 건 맛이 없고, 익어도 망고 특유의 거부감 드는 냄새가 나요."

―애망빙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애플망고를 널리 알렸으니 감사하죠."

서비스는 온몸 다해 장렬하게

그가 호텔·리조트에 관심 갖게 된 건 열대 과일 때문이었다. "내로라하는 명소를 다녀봤지만, 우리 농장 주변이 훨씬 아름답더라고요. 지인이나 친구가 제주를 찾았을 때 모실 만한 호텔이 아쉽기도 했고요." 박 대표는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 객실 23개짜리 부티크 호텔 '카세로지(Kase Lodge)'를 2023년 세웠다. 호텔 앞에 솟아 있는 '가세오름'에서 이름을 따왔다. 아침·저녁 식사와 간식, 객실 내 음식·음료, 짐·스파·노천탕 시설 이용이 모두 포함된 '올 인클루시브(all inclusive)'인 카세로지는 국내 부티크 호텔 최초로 5성 등급을 받았다.

―대형 리조트를 매각하고 소형 부티크 호텔을 새로 낸 이유라면(박 대표는 2002년 '샤인빌리조트(현 소노캄 제주)'를 설립·운영하다가 2017년 대명그룹에 넘겼다).

"최고의 호텔을 만들고 싶었어요. 최고의 음식과 서비스를 제공하기엔 오히려 규모가 작은 호텔이 유리하지요."

―이 호텔 서비스는 뭐가 다른가요.

"손님이 호텔에 오셔서 떠날 때까지 한 직원이 전담합니다. 자신을 알아주고 챙겨주면 손님은 감동하지요."

―세계 고급 호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버틀러 서비스'네요.

"형식적으로 서비스하지 말고 이유를 생각하고 마음을 담으라고 늘 말해요. 손님이 떠날 때 밖에 서서 배웅하지요. 왜 손님이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봐야 할까요? 혹시라도 호텔을 나가다 사고가 나면 쫓아가서 해결해 드리기 위해서다, 그런 마음으로 지켜보라고 교육합니다."

―농장과 호텔, 뭐가 더 힘든가요.

"호텔이죠. 사람을 상대하잖아요. 손님뿐 아니라 직원도요."

―농원이나 할걸 후회는 안 하세요.

"사는 게 길어 봐야 100년입니다. 우주로 볼 땐 아무것도 아니죠. 이 짧은 인생을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장렬하게 살다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내가 살았다 가는 존재의 표현이죠. 똥을 퍼도 장렬하게, 청소를 해도 장렬하게!(웃음) 기고자 : 제주=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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