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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막겠다＂ 방탄조끼 입고 戰場 뛰어든 IAEA총장

"넥타이 대신 방탄조끼를 걸친, 최전선(frontline)의 외교관."

한 유럽 매체가 라파엘 그로시(61)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묘사한 말이다. 우크라이나 남부의 자포리자 원전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투로 일촉즉발 핵 사고 위기에 처하자, 그로시 총장은 현장에 뛰어들었다. 지난 1일(현지 시각) 그가 13명의 사찰단을 이끌고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지나 자포리자 원전에 등장하자 외교가에선 놀라움과 찬사가 쏟아졌다. 로라 홀게이트 빈 국제기구 주재 미국 대사는 "그로시 총장의 자포리자 방문은 원자력 안전 분야의 새 이정표"라고 했고, 필리프 에레라 프랑스 외무부 정치·안보국장은 그를 "보기 드문 집념(perseverance)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역대 IAEA 총장 중 전쟁 중인 핵 사고 위험 지역까지 들어간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AFP통신은 한 EU 고위 관료를 인용, "지금껏 이런 스타일의 IAEA 총장은 없었다"며 "그로시 총장이 대단한 용기를 보였다"고 전했다. 국제기구 대표라고 하면 뉴욕이나 제네바, 빈의 고급 사무실에서 정장을 차려 입고 세계 각국 대표를 만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그로시 총장은 넥타이와 정장 대신 방탄조끼를 입고 위기 현장에 뛰어드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의 우크라이나 방문은 벌써 세 번째다. 러시아 침공 직후인 지난 3월 말 키이우를 찾아 우크라이나 내 15곳에 달하는 원자로와 핵 시설의 안전 대책을 협의했고, 4월에는 러시아군 점령 중 핵 사고 위험이 고조됐던 체르노빌을 직접 찾았다.

그로시 총장은 자포리자 원전에선 "IAEA가 자포리자에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며 "우리는 이곳에서 사고가 터지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이 전투 행위 중단 등 원전의 안전 보장을 위한 실질적 조치는 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만 하는 상황에서, IAEA가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한다는 사명감을 드러낸 것이다.

자포리자 원전은 냉각수 순환 장치에 연결된 외부 전력선 4개 중 3개가 포격으로 손상돼 최악의 경우 '노심 용융(멜트 다운)'에 따른 대규모 방사능 유출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로시 총장은 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총 52쪽 분량의 사찰 보고서를 제출하며 "양측의 위험한 '불장난(무분별한 전투 행위)'을 막기 위해 원전 주변 지역을 '보호 구역'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로시 총장의 뚝심과 집념은 원전 사찰 추진 과정에서도 돋보였다. IAEA 사찰 필요성을 러시아에 끈질기게 요구해 관철했고, 현장에선 "IAEA 요원 2명을 상주시키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IAEA가 (원전 사찰을 성급하게 추진하면서) 원전 비무장화와 서방 언론의 취재를 관철하지 못했다"며 "러시아 측에 유리한 사찰이 될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원전의 안전 확인이 더 중요하다"며 개의치 않았다. 이해 당사국들의 정치적 외압에도 초연한 모습이다.

이는 이란 핵 합의(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복원 협상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란 관영 언론이 "이번 협상의 가장 큰 난제는 그로시"라고 보도할 정도다. JCPOA 복원의 선결 조건으로 이란이 숨겨 놓은 핵 시설 4곳을 사찰하고, 이곳에서 생산한 핵 물질의 행방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는 것이 IAEA 입장이다. "빠른 합의를 원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IAEA의 강경한 태도에 부담을 느낀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IAEA는 이란 핵 시설 사찰이 JCPOA와 상관없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의한 것으로,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결국 이란이 지난달 24일 미국에 보낸 의견서에서 IAEA 사찰 면제를 포기하면서, 그의 뚝심이 먹혀들었다.

그로시 총장은 아르헨티나 외교관 출신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가톨릭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아르헨티나 외교부 정치조정국장, 벨기에 대사, 제네바 대표부 대사 등 요직을 거쳤다. 2010년부터 3년 6개월간 IAEA 사무차장을 지냈고, 2019년 IAEA 총장이 된 핵 안보 전문가다. 스페인어 외에도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를 구사한다. AFP는 "그로시 총장이 차기 유엔사무총장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고자 : 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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