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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겪고도… 경찰 대응, 디지털 성착취범 못따라가

제2의 'n번방 사건'이 발생했지만 경찰이 8개월째 주범을 잡지 못하고 있다. 2020년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이 검거된 이후 'n번방 방지법'까지 나왔지만, '공조 수사 체계'를 비롯한 경찰 대응 시스템은 지능적인 '성착취 영상물 제작범'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지난 2020년 n번방 사건을 고발했던 '추적단 불꽃'과 서울경찰청 등에 대한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이른바 '엘(L)'이라고 불린다는 이번 사건의 범인은 지난 1월 10대 피해자 A양에게 '개인정보와 사진이 유포되고 있다. 도와주겠다'며 접근했다. 범인은 '유포범을 추적해야 하니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며 A양에게 도움을 주는 것처럼 위장했고 A양은 이에 응했다.

이후 범인은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A양이 소셜미디어 등에 비공개로 올린 사진을 해킹해 이를 빌미로 A양에게 '성착취 동영상'을 찍어 보내라고 해 수십 개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수법에 당한 피해자는 A양뿐만 아니라 7~8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피해자에게는 10시간 가까이 성착취물을 요구했으며 이런 수법으로 제작·유포된 동영상은 350개에 달한다고 한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지난달 31일부터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35명의 수사 인력을 배치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경찰 대응이 늦었다는 지적이 많다. 사건 피해자 중 한 사람이 피해 사실을 고발한 것은 이미 지난 1월이었다. 그는 경기 파주경찰서에 가해자와 나눈 텔레그램 대화방 등의 자료를 제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파주서는 디지털 성범죄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이버수사과' 대신 '여성청소년과'에 이 사건을 맡겼다. 그리고 디지털 범죄 관련 수사 경험이 있는 서울경찰청이 전담팀을 만든 것은 약 8개월 뒤, 언론에 보도가 된 뒤다. 또 파주서는 고발이 접수된 후 페이스북 협조를 받아 범인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IP(인터넷 접속 주소)를 파악했다. 하지만 범인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고정 IP 대신 유동 IP를 사용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수사는 답보 상태에 놓였다. IP를 추적하면 범인의 활동 지역을 추정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유동 IP 기록은 법적으로 통신사가 3개월만 보관한다. 경찰이 IP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이력이 사라진 뒤였다. 경험이 적은 일선 경찰서에서 사건을 맡다 보니 '골든타임'을 놓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 그 사이 가해자는 텔레그램에서 자취를 감췄다. 경찰은 n번방 사건 당시 텔레그램 대화 내용을 단서 삼아 조주빈을 먼저 붙잡았는데, 그 뒤 '박사'란 별명을 쓰던 n번방 주범의 지시가 멈춘 것을 근거로 조주빈이 주범이라는 것을 특정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범인이 대화방을 옮겨 다니면서 범행을 저지른 데다 지난달 말 경찰이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뒤 텔레그램에서 잠적해버려 단서를 더 파악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엘'이라는 가해자가 누군지 특정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또 2년 전 n번방 사건을 겪었지만, 경찰 등 국내 수사 시스템은 텔레그램 등 해외에 서버를 둔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해 자행되는 범죄에 대해서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한 경찰 수사관은 "각국 수사기관은 텔레그램 본사나 서버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라며 "텔레그램뿐만 아니라 해외에 서버가 있는 기업들은 수사 협조를 요청해도 묵묵부답이라 한계가 있다"고 했다.

2020년 당시 n번방 수사를 담당했던 한 수사관은 "당시에도 텔레그램으로부터는 정보 수집이 어려워 피해자들이 제출한 텔레그램 대화 내역과 수사관들의 다크웹 위장 잠입으로 겨우 조주빈을 잡았다"고 했다. 또 다른 수사관도 "디지털 범죄에 관해서는 외국 정부나 그 나라 기업과의 수사 공조 등이 2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게 별로 없다"고 했다. 기고자 : 김수경 기자 이해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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