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꽃천지다. 눈부신 꽃계절에도 지구촌 한편에서 전쟁 뉴스가 연신 날아온다. 경주 보문호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꽃비로 바뀔 무렵, 북쪽 고개 너머 무장산 입구에도 벚꽃 터널이 열리기 시작한다. 꽃과 무기가 함께하는 곳을 찾아간다면 이 시절에 더욱 어울리겠다.

무장산(䥐藏山)과 무장사(寺)는 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투구(?)를 묻은(藏) 곳인지라 전쟁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호국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삼국유사 '무장사' 조항에 "세간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 안에 묻었기(藏兵鍪於谷中) 때문에 무장사로 이름 지었다"고 했다. 다른 기록에는 "원성왕의 부친께서 문무왕을 추모하여 투구와 병기를 묻은 자리에 무장사를 창건했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무열왕과 그 뒤를 이은 문무왕 시대까지 삼국과 왜(倭), 그리고 당나라까지 가세했던 큰 전쟁이 두 번 다시 없기를 바라던 왕들의 비원(悲願)이 서려있는 곳이다.

무장사 가는 골짜기는 꽤 길다. 길은 걷기 좋을 만큼 다듬어져 있고 군데군데 물빛 산빛이 아름다운 자리에는 쉼터도 갖추었다. 이윽고 '무장사지' 표지판과 함께 계곡을 건너가는 다리가 보인다. 다리 끝에는 방부목으로 만든 계단이 산 언덕길을 따라 이어진다. 무장사 옛터에는 이미 절은 흔적조차 없고 삼층 석탑만 천년 세월을 꿋꿋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라 탑에 대한 경외심이 저절로 일어난다.

왕명으로서 무(武)의 원조는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무왕이라 하겠다. 천하를 평정한 후 무력을 거두고 문교(文敎)를 닦았으며, 말은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으로 돌려 보내고 소는 도림(桃林)의 뜰에 풀어놓은 뒤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서경' 무성(武成) 편은 기록하고 있다. 즉 무(武)라는 의미의 방점을 전쟁이 아니라 평화에 찍은 것이다. 신라 문무왕도 마찬가지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누리게 했다(鑄兵戈爲農器 驅黎元於仁壽)"고 삼국사기 '문무왕' 부분에 서술했다.

무왕과 무열왕 문무왕에 무(武) 자가 붙긴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병기와 투구를 땅에 묻었고, 창을 불에 달궈 쟁기로 바꾸고 칼을 두드려 호미를 만들었으며, 군마를 들판에서 자연과 함께 살도록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쟁이라는 어쩔 수 없는 왕의 마지막 선택 후에도 반전론자들의 이분법적 논리는 늘 딜레마였다. 결정하는 사람은 소수지만 피해자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많은 까닭이다. 특히 전쟁 결정 주체는 살 만큼 살고 누릴 만큼 누린 노(老)세대지만 주 희생자는 아직도 앞길이 창창한 젊은 세대라는 사실도 엄청난 부담이다. 생명 있는 것들이 자기 수명을 다하지 못하도록 하는 허물은 속죄할 방법이 없는 '불통참회죄(不通懺悔罪)'에 해당함을 율법(律法)주의자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으리라.

어쨌거나 전쟁은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인 '예방'이 제일이다. 무열왕과 문무왕 시대에 왕들과 함께 평생 전장을 누빈 김유신 장군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항상 평화를 원했지만 일선 지휘관인 실무자로서 전쟁 대비를 늘 염두에 둔 고민을 함께했다. 장군의 능 입구에 조성된 흥무공원에는 김해 김씨 후손이 이런 속마음까지 담은 멋진 말씀을 금석문으로 새겼다. 화사한 봄날 경주의 최고 벚꽃길이라는 흥무로를 오가는 상춘객에게 꽃이 주는 감동과는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검은색 어록비(語錄碑)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한문과 한글을 번갈아 읽기를 거듭했다.

지성공지불이(知成功之不易)나 염수성지역난(念守成之亦難)이라.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쉽지 않지만 평화를 지키기 또한 어려움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기고자 :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410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