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따스한 봄바람에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지니 차가운 냉면 한 그릇 생각이 절로 난다. 냉면 하면 떠오르는 것이 20세기 초 문화재 수집을 소재로 한 전시를 준비하다 우연히 발견한 1925년 신문 기사다. 큰 글씨로 "평양냉면 업자의 이상한 결의, 맛있는 냉면을 맛없게 하자고"란 제목 옆에 이런 기사가 이어졌다. "최근 평양에 냉면집이 늘면서 '아지노모또'(일본 조미료)도 쓰고 닭고기 육수로 덧국도 쳐가며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졌는데, 그러다 보니 생산 원가는 늘고 이익이 줄어들자 냉면 업자들이 회의를 열어 서로 이런 방식으로 맛을 더하지 않기로 결의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조미료를 썼다며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육수 솥에 조미료를 넣는 영상까지 방송으로 송출되면서 그저 고기를 고아 맛을 냈다고 생각했던 단골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식당은 바로 사과문을 발표하며 석고대죄했다. 위의 기사대로라면야 그 식당은 예전 평양냉면의 비법을 제대로 이어온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조미료를 안 쓴다고 난리더니 이제는 쓴다고 뭐라 한다.

변한 것이 그뿐인가? 요즘 냉면은 여름이 제철이지만 옛날에는 겨울의 별미였다. 한겨울이 아니고서야 얼음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을 테니 요즘처럼 여름에 냉면을 즐길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서 춥기로 손에 꼽는 동네, 강원도 철원에 사셨던 집안 어르신들은 찬 국수는 겨울철이 제맛이라며 꼭 추운 날 막국수를 드셨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매년 여름마다 냉면 식중독 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니 냉면이 여름 음식으로 자리 잡기까지 진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셈이다. 냉장고가 널리 보급되고 사시사철 어디서나 손쉽게 얼음을 구하고 육수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이제 냉면과 겨울은 어색한 조합이 됐다. 냉면의 사촌이라 할 수 있는 밀면은 여름 한철만 장사하는 집도 적지 않다.

둔감한 미각을 갖고 태어난지라 육수의 가미(加味) 여부는 알 길도 없고 또 알아낸다 한들 탓할 마음도 없다. 그러나 면만큼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씻어낸 것이 최고다. 공기는 온화하고 아직 물은 찬 지금, 그래서 내겐 지금이 냉면의 적기다. 기고자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087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